시집 『웃는 연습』 (창비시선 413, 2017.8.31)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돈 버는 일에 비해 결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는 (…) 팍팍한 사회가 한국사회다. (…) 사회 자체의 존속이 문제 될 수 있는 전반적인 사회재생산의 위기의 핵심에는 돌봄의 위기가 있다. (…) 공공성이라는 용어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공(公/共)’이 포함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의 공공성은 공(公)적인 것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경향이 크며, 그때의 공적인 것은 다시 국가를 중심으로 이해되곤 한다. (…) 국가의 지원을 늘리는 것만으로 바로 돌봄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고 공(共)의 문제, 다시 말해 돌봄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共同體)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할 커먼즈(commons)론을 검토하면서, 일반적으로는 공(共)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커먼즈가 실제로는 공(公), 공(共), 사(私) 영역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음을 (…)”
-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20-23, 『창작과비평 2017 가을호』)
[소한(小寒)의 밤] - 박성우
장작불을 쬔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외할매와 외할매 흰 머리카락을 뽑아 화롯불에 던져보던 산골 꼬맹이와 그새 마흔일곱이 된 내가 장작불을 쬔다
툭툭 타오르던 장작불은 이내 시들고 외할매와 산골 꼬맹이와 옛날이야기는 흰 머리카락 타는 소리처럼 사라지고 나는 그만 잠을 청하러 간다
세상의 모든 할머니가 외할머니이던 시절이 있었다. 내 세대만 하더라도 자식의 숫자가 셋을 넘기 일쑤여서 세상의 할머니는 거진 외할머니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이야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고도 하고, 출산은 선택에 가까워졌고, 딸 가진 경우의 수까지 보태면, 외할머니 되는 일이 동전던지기 확률보다 훨씬 낮게 되었다. 세상의 손주들은 여전히 외할머니가 주는 아련한 기억을 가질 수 있지만, 이제 외할머니들은 눈에 밟히는 귀여운 손주들을 천운으로 돌려야 한다.
근래 공동체와 관련한 커먼즈 운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학문적 연구로까지 발전한 커먼즈 운동은 '자연자원의 관리 방식' 뿐만 아니라 '돌봄을 중심으로 한 현 사회재생산의 위기 해결' 등 사회의 건강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가 보다. 커먼즈 운동을 상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해서 가장 작은 공동체는 아마도 가족이고, 가족 공동체 가운데 손주와 외할머니처럼 무너진 한 전형(典刑)에서도 그 운동의 필요를 찾을 수 있다. 손주가 있는 경우가 크게 줄었고, 있는 손주를 돌보겠다는 노모는 더욱 적은 게 현실이다. 거꾸로 노모가 심신이 피폐했을 때 자식이나 손주가 돌보겠다는 미담을 듣기도 어렵게 되었다. 아마도 요양원을 활용할 공산이 대부분일 것 같다. 그것을 개인주의가 성장한 탓이라고, 현대 삶이 그만큼 팍팍한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족 공동체라는 사적 영역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국가가 겨우 노령수당이나 지급할 수 있을 때, 커먼즈 운동은 사회가 건강을 회복하려는 여정에서 멀리 반짝이는 등대처럼 희망이 될 것도 같다.
박성우 (1971-) 시인은 대학교수직을 던지고 귀향하였다고 한다. 그가 시골에서 하는 일이 시인인 걸 보면, 그는 시인에 전업할 요량으로 대학교수를 하찮아 한 셈이다. 시가 그만한 값이 되는지 계산하기 어렵지만, 그의 시에는 그만한 값이 있어 보인다.
[회사원] - 박성우
대지도 알약 하나를 삼키듯 하루해를 넘긴다
한 줄짜리 시 [회사원]에서 시인이 귀향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하루해 떨어지는 풍광을 대지도 알약 하나를 삼킨다고 할 때, 회사원에게 반복되는 일상이 얼마나 삶을 지치게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알약 하나로 건강을 기대하는 일과 넘어가는 하루해와 제목에 걸린 회사원을 관통하는 감상은 연민이다. 그렇게 버텨내야 하는 일상이 싫었을까, 시인은 시인하러 시골로 갔다.
박성우 시인처럼 외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외할머니 옛날이야기 속에 꼬맹이였던 자신을 앉혀 두고, 잠을 청하러 가는 일은 슬픈 듯 기쁘다. 어쩌면 그런 추억은 더는 있을 수 없을지 모른다. 시인은 시인하러 시골로 간 것이겠지만, 시골에는 아직 공동체의 화석이 남아 있다. 그의 시에서 그런 화석이나마 발굴하듯 읽을 수 있는 그것이 그만한 값이 아닐까 싶다.
(2017.11.10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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