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5

시의 끝에 걸리는 무게 – 문태준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와 [호면]

진후영 2015. 6. 18. 19:56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4.20) 

  이 시집에는 사물이나 인물, 사건 내지 풍경이 짧게 서술된다. 시집을 통틀어 61편의 시 가운데 한 페이지를 넘기는 시는 겨우 두 편이다. 대개의 시는 몇 줄에서 열 줄 남짓한 운문 형식이거나, 산문 형식이라야 페이지의 반도 안찰 만큼 짧다. 언어를 절약한 시인의 솜씨는 맵지 않고 짜지 않고 오히려 깊다. 그의 시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 문태준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
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노인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
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
그러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
팔을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
노인의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건널목을 건너는 할머니의 걸음 속도를 참아주는 차들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많은 차량들이 그분의 갑갑한 저속을 참아주다가, 다 건너고 난 후 출발하더라는 기사였다. 그 당연지사가 기사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참을성이 대견한 건 현실이다. 시인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시집에 기사화하고 있다. 시인이 다른 점은 그 대견함을 보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 시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팔을 내두르는 시늉”은 노인이 빨리 가려는 의지를 내비치는 몸짓이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처럼 느린 걸음은 전혀 빨라지지 않고 있다. 의지와 현실의 격차는 아이러니이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는 미안함을 지우려는 표정이다. 그 풍경은 늙음에 대한 애처로움이면서, 서로에 대한 배려이면서, 우리의 삶의 결말이면서, 그런 것을 모두 긍정하려는 재현(再現 – 이 시는 과거시제로 쓰여 있다)이다. 이 시는 읽는 우리를 슬픈 행복으로 이끄는 아이러니다. 진실로 우리는 가볍게 웃기 어렵다.

[호면(湖面) – 드로잉 7]          - 문태준

옛 생각을 하게 하는 군
나를 자꾸 들추는 군

속울음을 울게 하는 군

수몰된 골목과 동산과 별
우물과 돌선이네와 느티나무
그리고 휜한 마당과 담장
그 너머 죄(罪)

넘실넘실 넘쳐오는 군

  수몰된 마을은 이 나라에도 많다. 수십 개의 다목적댐이 있다니까, 그만한 지역들에 수몰 이재민이 있을 테다. 수몰 지역을 내려다보는 이재민의 시선에 옛 생각이 스미는 건 인지상정이다. 수몰된 골목과 동산과 별, 물과 돌선이네와 느티나무, 그리고 마당과 담장은 모두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소재들이다. 기억은 아마 그런 대상들을 매개로 하여 차오르는 수위(水位) 같은 것인가 보다. 

  이 시는 뜻밖의 것으로 읽는 우리를 흔든다. 시를 읽어나가는 시선의 끝에 걸리는 서술 -  “그 너머 죄(罪)”는 정말 무겁다. 시인이 한때는 남달리 망나니여서 지은 죄가 수몰 전에 많았을까 기대(?)한다면 짓궂을 뿐이다. 모든 기억은 죄다 죄(罪)다. 기억에는 후회가 깔려있으며, 후회는 다름 아닌 죄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셈이다. “그 너머 죄(罪)”는 바라보는 호면(湖面)의 물결처럼 “넘실넘실 넘쳐오는” 중이고, 시인은 거기서 참을 수 없는 속울음을 운다. 우리도 참회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을 품고 있다. 기억은 그렇게 죄가 되고, 죄는 모두에게 무겁다.

(2015.6.1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