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5

조개와 게는 동색인가 – 정영 [멍을 토하는 자들]

진후영 2015. 7. 5. 01:08

시집 『화류』 (문지사, 2014.12.31) 

  회의주의자든 아니든 간에, 시인의 자격은 그의 윤리보다 시의 심미(審美)에 더 비중을 두는 게 낫다. 시에서 윤리를 보려는 것은 시의 위대함을 보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탈 많은 시대에는 그게 다 허영일지도 모른다. 시가 다만 아름답다면,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미의 미든 추의 미든, 이는 시를 세우는 최소공배수 같은 것이다. 아니, 미는 시의 최대공약수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는 진리의 영역을 과학에 내준 것 같고, 진리에 대한 함구는 윤리를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는 다만 소박한 영역 – 미의 세계로 쪼그라들고 있는 것 같다.

  정영의 시집 『화류』를 통틀어 내가 꼽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이것이다.

[멍을 토하는 자들]          - 정영

울컥, 멍을 토하는 조개들
어떤 말을 못 해 빈 바다에서 이토록 입을 벌리나
새들이 날면
누군가 왔나 싶어
구멍에서 삐죽이 솟는 눈빛들
아무도 없나 싶어
삐죽이 새어나오는 바다

사는 게 게워내는 일의 연속이라
저 하늘의 별들을 품을 생각도 못 했지
뼈가 있는 몸도 가시가 있는 몸도 아니어서
당신의 마지막 발자국마저 가슴에 밀어 넣는 이 갯벌에선
돌맹이로 문을 걸어 닫네
입을 잠그네

누군가 이별을 말할 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걸까

석양이 지느라
시뻘건 뻘이 밀며 밀려 차오르는 시간
불어가다 울컥, 멍을 토하는 바람
한 주먹 더 캄감해지는 하늘
한 웅큼 더 캄캄해지는 바다

어둠이 제 이름을 부르다
그 큰 덩치로 울컥, 멍을 토해서
한 사람의 마음만큼 더 캄캄해진 사람

  이 시는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확연하게 품고 있다. 그 하나는 대상을 인성으로 전환하는 것(시적 언술 면)이고, 또 하나는 단일한 모티프를 밀고 나가는 것(시적 구조 면)이다. 아름다움은 대개 앞에 것에서 나오지만, 뒤에 것이 받쳐줄 때만 그러하다. 따라서 두 가지는 시가 시일 수 있는 조건인 셈이다.

  이 시는 조개의 생태를 모티프로 하여 이별을 노래한다. 이별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별의 서정을 드러낸다.

<조개의 생태>           <시적 언술>
뻘을 뱉다           -->  멍을 토하는, 게워내는 일
입수공을 내밀다  -->  삐죽이 솟는 눈빛들, 새어나오는 바다
갯벌에 숨다        -->  발자국마저 가슴에 밀어 넣는, 문을 걸어 닫네

  시적 언술 면에서, 이 시는 조개의 생태를 빌어 화자의 속내를 교묘히 드러낸다. 멍을 토한다거나, 어떤 말을 못해 빈 바다에서 입을 벌린다거나 하는 건 조개의 뻐끔거리는 모양에 화자의 마음을 실은 의인(擬人)이다. “당신의 마지막 발자국마저 가슴에 밀어 넣는 이 갯벌”은 화자가 서있는 현실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간다. 아주 떠나나 보다. 그러나 새들의 기척에 숨는 조개처럼 나는 가슴 속으로 슬픔을 밀어 넣기만 한다.

  시적 구조 면에서, 이 시는 가운데 연을 중심으로 후반의 두 개연은 석양과 바람과 바다로, 그리고 사람으로 시선이 바뀐다. 조개라는 좁은 포커스에서 넓은 공간으로 확대되다가, 다시 한 사람으로 포커스를 좁히는 구도를 보여준다. 그 시선의 이동에는 ‘멍을 토한다’는 모티프가 줄곧 이어진다. 그 모티프를 통하여, 이 시는 복잡한 듯 단순한 듯 그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보일 듯 감출 듯 희미하게 의미를 드러낸다. 겁에 질린 듯 슬픈 듯 이별을, 그 감정을 감춘다.

  시의 중심인 3연 -“누군가 이별을 말할 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걸까”는 좀 생뚱맞은 표현이다. 시집의 다른 시를 보면, 시인에게 출생은 고(苦)의 시작이다. 당신이 이별을 말하는 그 순간 생의 진짜 고를 느낀다는, 그 이전의 생의 고는 하찮은 것들이었다는, 슬픔의 과장이 아닐까 싶다.

  이 시에 감탄하면서, 나는 이 시의 기술 두 가지를 꼽아보았다. 비평가 황현산 선생이 이런 천기누설(?)을 한 적이 있다. “약간의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예술적 재능을 흉내 내기는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구조, 몇 가지 코드를 눈치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경향신문, 2015.5.27자 [마더 구스의 노래], 잔혹동시집 논란에 관한 칼럼 중에서) 그 몇 가지 구조와 코드는 선생에게서 사사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이 시에서 그 두 가지를 짐작해본다.

(2015.7.4 진후영)


[사족] 이 시를 읽으면서 왜 하필 조개일까 조금 헛갈리는 게 사실이다. 내 상식에는, 뻘을 먹고 다시 토해내는 건 게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시인은 자꾸 조개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조개의 생태를 찾아보았지만, 그럴수록 그게 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의심만 굳어진다. 시를 읽는 동안 조개와 게 사이를 혼동하는 게 내가 과민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설혹 그게 혼동이더라도 시적 모티프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시는 사실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대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