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는 복도 없다 – 신경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시집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2.4)
이 시집의 4부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무하는 내용이다. 거기서 시인은 노숙자, 걸인, 재해 피해자, 폐지 리어카의 노인 들을 축복한다. 진실로 선량한 목자(牧者)가 가련한 신자를 위하듯이 기도하는 것 같다.
어느날 당신은 당신이 가진 것들이
견딜 수 없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순간, 몸에 붙은 것들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처럼 가벼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새, 부끄러움도 모른 채] 중에서)
시인에게 “지하철역 입구에 나와 둥지를 틀고” 앉은 걸인은 “가진 것이 견딜 수 없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은 현자(賢者)로 보이는가 보다. 그래서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싶을 때……당신처럼 지하철역 입구에 나와 앉지만”, 시인은 “거짓과 허영을 하나씩 더 챙긴” 자신을 느낄 뿐, 그 현자 앞에서 부끄럽다.
이것은 어마한 방향착오이다. 서정시는 오늘날 ‘화자의 자기고백’이다. 서정은 화자의 것이고, 화자의 것일 때 서정은 새로울 수 있다. 그 시는 지하철 입구에 나와 앉은 걸인을 상대하여 화자인 시인이 자기반성을 하는 서정처럼 보이지만, 걸인을 ‘가진 것들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워 모두 털어버린’ 현자로 읽는 독법에서 어긋나고 있다. 시인은 서정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서정을 끌어내는 감상(感傷)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방향착오는 또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신경림
그에게는 따듯한 봄날의 기억이 없다.
그저 늘 추웠다.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서방 잃고
아들딸 따라서 사글셋방 전셋집 떠돌면서
종잇장처럼 가벼워졌다가
마침내 폐지로 버려졌다.
폐지 더미를 실은 수레를
딸이 밀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에미를 닳아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다.
그는 폐지 위에 쓰인 글귀를 입속으로 읽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에미가 평소에 버릇처럼 뇌던 말을 발견하고 그는 반갑다.
오늘 아침 집이 헐렸지만
중년의 아들은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폐지로 바뀐 에미를 실은 수레를 밀면서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 구제는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속담은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다. 보수진영은 오늘날 진보진영보다 정치에서 훨씬 세련되어 보인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보수도 복지를 주장한다는 데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복지가 진실성이 있느냐는 현실정치에서 그리 본질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은 그런 주장으로 선거에서 이기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고, 어떤 수단이든 권력이 본질이다. 보수는 이제 세련됐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운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무지와 나태가 가난한 자의 특징이라고 거만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은 부나 권력보다 지혜를 더 많이 축적한 것 같다.
시에서 ‘그’는 가난한 에미다. 평생 ‘사글셋방 전셋집을 떠돌면서 종잇장처럼 가벼워졌다가 마침내 폐지로 버려졌다.’ 그 에미를 따라 딸이 대물림으로 폐지 수레를 밀고 언덕을 오른다. “에미를 닮아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은 딸은 폐지 위에 쓰인 글귀를 읽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딸은 그 순간 행복하다. 미안하지만, 현실에서 하늘나라는 그의 것이 아닌 게 확실하다. 에미처럼 죽고 나야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 땅에서는 진실로 행복하기 어렵다.
정치는 가난도 부자도 만든다.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것이 정치이다. 이제 보수는 가난이 무지와 나태 탓이라고 더는 말하지 않는다. 날로 세련되고 있다. 시도 보수만큼은 세련되어야 한다.
지하철역 입구의 걸인으로부터 ‘화자’인 시인이 현인을 읽는 것이나, 마음도 가난한 ‘화자’가 굽은 허리로 수레를 밀고 언덕을 오르는 것이나, 이 시대는 그것들을 서정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시의 ‘화자’는 시인만이 아니고, 나일 수 있고 그일 수 있고 누구일 수도 있다. 그 말은 ‘화자’가 사회 속의 누군가이며, ‘화자의 자기고백’이란 사회 속 누군가의 자기고백이라는 뜻이다. 서정은 시인의 영역에서 사회의 영역으로 이미 넓어져 있다.
신경림 시인은 더 넓은 서정까지 나가기는 싫으신가 보다.
(2015.8.4 진후영)
[사족]
서정시를 '1인칭 자기 독백'이라고 보는 시각은 낡은 것이다. "좁은 의미의 서정시에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까닭에......1인칭 시점의 자기 독백 형식을 취하게 된다." (오세영, 시론, 90).
반면에 서정시를 "화자의 자기 고백"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새롭다. 시의 화자는 시인일 수도, 제3 자일수도, 심지어 사물일 수도 있다. 1인칭에서 화자로 서정의 주체가 확장된 것은 서정의 지평을 거의 무한히 늘린 인식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