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의 질감과 언어의 질감을 느끼는 차이 – 유병록 [지붕 위의 구두]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2014.2.25)
시집을 읽으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2014/15년 근간 시집들을 읽는 동안, 특히 창비시선의 시집들 가운데 자주 가슴 벅찬 느낌을 받는다. 아직 문단의 주류 출판사가 창비와 문지인 것 같지만, 두 출판사의 경향은 사뭇 차이가 난다. 전통이랄까, 창비가 실체적이라면 문지는 예술적이랄까. 말하자면, 창비는 좀더 독자에 가깝고 문지는 보다 예술에 가깝다. 여기에는 시인과 출판사와 독자의 기호가 얽힌다. 세 개 원이 겹치는 부분의 삼각꼴 – 아마도 거기 모두를 위한 찬란한 세계가 있을 것도 같다. 그곳은 아름다움과 새로움과 공감의 영역이다. 가치와 모색과 발견의 세계이다.
유병록 (1982-)의 첫 시집이 그 세 개 원의 교집합 부분에 딱 맞추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창비의 시집을 집어 들었을 때 실망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것은 창비의 시선이 더욱 독자를 향해 있다는 증거이고, 유병록의 시집이 그러하다. 그의 시집은 한두 곡 히트하는 가요 앨범 같은 것과 급이 다르다. 버릴 시를 찾기가 좋은 시를 찾기보다 훨씬 어렵다. 그 시집에는 대표시가 없는 셈이다. 거반 어느 시든 대표시 같기 때문이다.
시집을 가볍게 일람하면서 고른 시가 이렇다.
[지붕 위의 구두] - 유병록
그러니까 어떤 힘이 염소를 끌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이다 난간에 묶어두고 사다리를 치운 것이다
벼랑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다 망가진 뿔로 구름을 들이받으려 했을까 곡선의 시간을 지나오느라 한쪽으로 기운 발굽을 쓰다듬었을까
오후의 햇살 속에서 조그맣게 울먹이기도 했을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뼘의 초원이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의 뒷발로 사다리를 밀쳐낸 기억이 떠올라 흰 털들이 곤두설 때
이 세계를 들이받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빛나는 털을 가진 세계도 어두워질 때, 두고 온 이름들이 눈동자 속으로 절뚝절뚝 걸어들어올 때
노을빛이 스러질 때
반짝, 발굽이 빛났던 것이다
곧 빠져나갈 체온의 질감을 간직해두려고 염소는 빛을 구부려 매듭을 만들었던 것이다 캄캄한 길 나서기 전에 구두끈 고쳐 매듯이
어려운 시가 아니므로, 한 눈에 잘 쓴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어떤 점들이 이 시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할까?
첫째는 한 대상에 포커스를 맞춘 집중력이다. 그의 시들은 거진 한 대상을 포착하여 관찰하고 상상한 한 장의 그림이다. 그간 읽은 시인들 중 저 아래 박소란 시인이 대상을 전면에 자주 세웠던 것보다 더 많이 더 철저하게 대상으로써 시를 밀고 나간다. 위 시는 지붕에 올라 간 염소가 대상이다. 날카로운 벼랑에 올라가 곡예 하듯 일상을 버티는 산양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지붕의 높이나 벼랑이나 목숨을 위협할 수준에서는 차이가 없겠다. 염소는 지붕에 올라가 지상의 일상을 탈출한 듯한 높이에서 당혹해 하고 그리워하고 결심한다. 마치 "캄캄한 길 나서기 전에 구두끈을 고쳐 매듯이" 사람처럼, 시인처럼.
둘째는 찬란한 언어들이다. 온갖 수사적 화려함으로 치장한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시 곳곳을 장식한다. 유병록 시인은 거진 대상으로써 말한다. 대상으로 이루어진 단편(短篇)은 그 자체가 바로 알레고리다. 우화가 이야기를 통한 교훈이라면, 그의 시는 대상을 통한 자의식의 토로라고 할 수 있다. 우화가 재미있는 것에 비하면, 그 대상에 빗댄 알레고리는 기발하다. 기발함이란 가끔 만나도 감탄스럽지만, 시마다 만나면 놀라움이 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시인은 시마다 자신의 기재(奇才)를 정성 것 쏟아 부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징, 은유, 특히 환유는 그의 시에 넘친다. 가령, ‘구름을 들이받다’의 구름, ‘오후의 햇살’의 햇살, ‘한뼘의 초원’의 초원 등은 상징어들이다. 그것들은 고난으로 위로로 양식(糧食)으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읽든 염소의 처지 이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곡선의 시간”은 ‘시간 = 곡선’의 은유(굴곡 많은 삶)이고, “빛나는 털을 가진 세계”는 염소 자신의 삶을 은유한다.
무엇보다 이 시의 환유적 언어는 대상을 그린 시가 의미를 품게 만드는 주요 트릭이다. “그러니까 어떤 힘이 염소를 끌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이다”는 첫 문장부터 환유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힘에 끌리다’는 흔히 설명하기 어려운 지향을 말할 때 쓰는 말이고, ‘높은 곳으로 가다’ 역시 모든 삶이 추구하는 목적지를 대신한다. ‘사다리를 밀치다’나 ‘흰 털이 곤두서다’나 ‘구두끈을 고쳐 매다’나 곳곳에서 시어들은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짐짓 상투적일 수 있는 그 말들이 고루하지 않고 놀라운 이유는, 그 말들이 염소를 거쳐 돌아 나오기 때문이다. 대상을 그린 시가 유리한 점이 여기에 있다. 염소에 빗댄 인간의 언어가 염소를 향하는 듯 하다가 독자에게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메아리는 지른 소리보다 훨씬 아름답다.
“두고 온 이름들이 눈동자 속으로 절뚝절뚝 걸어들어올 때” 라는 표현은 또 얼마나 가슴 아린가. 지붕 위의 염소는 마치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시인 같다. “곧 빠져나갈 체온의 질감을 간직해두려고” 염소는, 아니 시인은 캄캄한 길을 나서듯 구두끈을 고쳐 맨다. 시를 쓰는 일이 일상을 사는 일보다 훨씬 어려울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돈 안되는 직업을 붙들고 세상의 시인들은 곧 빠져나갈 듯한 체온의 질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지 않을까.
나는 겨우 그들의 언어의 질감을 느낄 뿐이다.
(2015.10.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