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를 쓰는 시인 – 안주철 [보디빌더]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 2015.6.22)
한국 배우 중 고현정을 다들 안다. 그가 한창 인기를 끌 때 텔레비전 가득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을, 잡티 없는 피부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부를 위하여 자동차를 타는 동안 한겨울이라도 히터를 켜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텔레비전 가득 비추이는 피부를 위하여 따듯하나 건조한 바람을 거부하는 그 결벽이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피부를 위한 인내이며 시청자를 위한 예의(?)라고 볼 수 있다. 피부를 관리하는 그의 의지와 철저는 그 세계에서 우뚝할 수 있는 자세 가운데 하나 아닐까 싶다.
서정시는 흔한 시이기도 하다. 사람의 정서를 흔드는 서정시를 그냥 시라고도 하고, 서정시라 특별히 부르는 이유는 시의 속성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니다. 사람의 정서는 슬픔과 기쁨 사이에, 나쁨과 좋음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으로 나뉠 수 있는 미묘함이 있고, 그 무한히 미세한 간격들 때문에 수없이 많은 시들이 정서를 노래해도 또 노래할 정서는 남아 있는 것 같다. 고현정이 배우로서 그러했듯이, 서정시의 세계에서 서정시를 또 쓰고도 남다를 수 있어야 한다는 고민을 시인이면 할 것이다. 피부에 자동차 온풍이 좋은지 나쁜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시인은 익숙한 세계로 들어가고 어떤 시인은 낯선 세계로 나아가고 할 때, 누구의 처방이 옳은지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 가운데 빛나는 시가 옳은 게 확실하다.
안주철(1975-) 시인의 피부 처방은 시적 언술이다. 그는 분명 서정시를 쓴다. 그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언어를 갈고 닦은 때문이다. 배우가 피부를 빛나게 하듯이 시인이 시적 언술을 빛나게 다듬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모든 시인의 피부가 다 빛나지는 않는다.
안주철의 시는 빛난다. 그에게도 어떤 비결이 있는 게 분명하다.
[보디빌더] - 안주철
자신을 들여다보는 운동처럼 쓸쓸한 게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거울을 닦고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거울을 가꾸는 우울한 운동
보디빌더, 위태로운 근육에 경계를 세우고
힘을 차곡차곡 쌓는다.
사내의 첫 퍼즐 조각은
사내의 출발은
균형을 감당하지 못하는 저 위태로운 가슴이다.
하체보다 상체를 더 사랑하는 사내의 편벽.
쏟아져내릴 것 같다. 사내의 생각들.
사내, 거울 앞에서 또다시 가장 자신 있는
포즈를 취하며 거울에 안긴다.
거울 밖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사내의 표정에
나는 늘 놀라지만
거울을 사랑하는 운동처럼 격한 운동이 있을까.
균형을 상실해가는 사내의 체력과 힘을 생각하고
사내의 밤일을 생각하고
사내의 마지막 비애는 몇 그램일지 생각하다가
아, 사내의 근육은 얼마나 눈부시고 튼튼한가.
거울 없이 한발자국도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운동처럼 심란한 운동이 또 있을까.
보디빌더, 오늘의 마지막 포즈를 눈동자에 새기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 시에 감탄한다면, 그것은 보디빌더의 아름다운 육체가 아니라 시의 아름다운 근육에 감탄하는 것이다. 시적 언술에 의한, 아름다운 시의 근육을 하나 만져 본다.
시인은 보디빌더를 자세히 관찰했음 직하다. 그가 거울을 벗삼아 근육을 가꾸고, 가슴 근육에 공을 들이고, 마지막 포즈를 취하고, 하는 동작들은 분명 섬세한 관찰에 근거하는 것 같다. 시의 절묘함은 그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 이후의 상상에서 나온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거울을 닦고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거울을 가꾸는 우울한 운동’이라고 할 때, 이 언술은 보디빌더의 몸에 대한 사랑을 거울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보디빌더가 몸을 가꾸는 형상이 관찰이라면, 몸을 거울로 바꾸어 놓는 비유는 상상이다. 보디빌더의 몸을 거울로 전이하는 그 기술은 비유지만, 그 비유를 만드는 그것이 시인의 상상이다. 관찰에 머물지 않고 상상으로 넘어가는 그 지점에서 시는 빛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운동처럼 쓸쓸한 게 있을까.
거울을 사랑하는 운동처럼 격한 운동이 있을까.
거울 없이 한발자국도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운동처럼 심란한 운동이 또 있을까.
이 시를 지탱하는 세 가지 질문이다. 세 질문을 통과하는 동안 보디빌더는 연약한 한 영혼으로 비추인다. 우람한 근육이 번민하는 영혼이 되는 변화는 꼼꼼한 관찰과 상상의 진일보(進一步) 덕분이다.
(2015.10.23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