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고객은 대중이다 – 김소형 [신성한 도시]와 [ㅅㅜㅍ]
시집 『ㅅㅜㅍ』 (문지사, 2015.11.11)
1.
근래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이 시끄럽다. 화투 그림으로 노래만큼 유명한 조영남이 상당 기간 상당량의 화투그림을 다른 작가 – 조수에게 그리게 하고, 저는 약간 덧칠이나 하고 사인하여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현대미술에서 조수 사용이 흔한 기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것은 현대미술을 제대로 알린 조영남의 혁혁한 공(?)이 틀림없다. 숙련된 장인의 붓질보다 시대를 꿰뚫는 ‘개념’을 중시하는 게 현대미술의 흐름이라는 한 미학자(진중권)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찜찜한 구석은 남는다. 그는 현대미술이 산업이며, 잘 알려진 미술가는 거의 중소기업에 맞먹는 ‘조사, 제작, 섭외, 마케팅, 포장 및 발송이 분업화되어 있다’고 트윗에서 주장한다. 한 화가가 유명해지기 전까지 손수 자기 그림을 그리지만, 유명해진 다음에는 고객의 수요를 혼자 그리는 속도로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한다. 그 수요를 못 맞추면 고객에게, 대중에게 잊혀질 각오까지 해야 한단다. 고객의 욕구를 맞추는 현대미술이 예술을 넘어 산업이라는 주장은 우리에게 갈등을 남긴다. 거기서, 예술의 타락을 읽어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술의 방향을 읽어내야 하는가?
2.
[신성한 도시] - 김소형
텅 빈 거리,
큰회색머리아비 푸른 깃 사이로
빗방울
떨어진다
창밖에 떨어지는 비를
이제 도시라고 부른다
증발한 도시
흘러간 도시
저지대 속 시체를 품고
멸망한 도시
벽난로도 없고 늙은 망령도 없는
도시에서
산산조각 난 채로
훌쩍이던
비
젊은 시인들이 새로운 시를 모색하는 패기를 비딱하게 볼 일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언제나 낡기 바로 전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움은 젊음이 꿈꾸어야 하는 욕망에 틀림없다. 문제는 시에서 그 새로움이 다름에 있거나 혹은 '환상'에 있을 것이라 게 또 다른 환상이라는 데 있다.
김소형(2010년 등단)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있다. 그는 젊고, 첫 시집에서 당연히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가 친숙하게 생각하는 대개 ‘대상’에 빗대어 심상을 노래하는 시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상상을 더 밀고 나간 ‘환상’이다. 환상이란,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적’ 현실(즉, 지각된 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환상의 시는 현실의 대상을 묘사하지 않으므로 하여 시어의 기교가 빠지기 마련이다. 환상은 대상을 기괴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아름답게 비유하지는 못한다. 환상에는 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없다.
위 시는 김소형의 첫 시집에서 가장 덜 환상적인 시를 고른 것이다. 도시에 비가 내리는 상황을 묘사하는 이 시는 낯설다. 그 낯섦은 ‘큰회색머리아비’(철새의 한 종류)라는 희귀한 이름을 앞머리에 배치한 것에서, ‘창밖에 떨어지는 비를 이제 도시라고 부른다’는 뜻밖의 비유에서 나온다. ‘비=도시’라는 등식은 기괴하며, 그러한 사물간 이름의 낯선 대체가 바로 김소형의 환상을 읽어내는 요령이 된다. 도시에 빗방울 떨어지고, 비는 증발하거나 흘러가고, 빗방울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비 = 도시’라는 등식은, 이해만 된다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비가 번잡한 도시라면, 빗방울은 소외된 인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3.
[ㅅㅜㅍ] - 김소형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
저는 환한 잠을 따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제게 잠을 먹이는 어수룩한 무리가 있었고 다시 이 세계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천사들이 있었지요 밤마다 불 피우며 땅속에다 숲을 두고 돌 속에다 숲을 두고 주머니에도 발가락 사이에도 두었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에게 총을 겨누는 병사들과 당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인부들과 숨겨둔 숲을 찾아 도끼질하는 벌목꾼들을 피해 그리하여 숲은 만들어졌습니다.
숲을 두고 숲을 두고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
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었습니다
시집의 표제작 [ㅅㅜㅍ]은 얼핏 읽으면 알기 어렵고, 한참 읽어도 알기 어렵다. 대개 그 시집의 시들이 그렇게 이해가 쉽지 않지만, 앞의 시에서 ‘비=도시’의 황당한 등식으로 그 이해의 방식을 끌어낼 수 있다. ‘ㅅㅜㅍ’은 숲이고, ‘숲=책’으로 대입해보자. 책은 누군가 꿈꾼 이상적 세계(관)이다. 진정한 가치를 찾는다는 속성을 대개의 책들이 갖는다. 그것을 꿈이니 음악이니 음성이니 부르는 건 그럴 만하다. 책이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관)는 종종 분서갱유나 금서목록으로 핍박 받는다. 진시황의 폭정과 수십 년 전 군부통치 시절, 아니 오늘날에도 금서목록이 있다는 소식은 여전히 들린다. 이 시를 ‘숲=책’으로 읽는 독법은 하나의 상상 혹은 논리일 것이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엉뚱한 사물로 대체하는 그것이 환상의 한 기법이다. 환상은 독자를 당혹하게 하지만, 환상을 꿈꾸는 시인조차 논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논리가 환상의 시를 읽어낼 수 있는 기반이고, 그 숨은 대상(이름)을 찾아보는 상상이 독자의 역할인 셈이다. 문제는 독자가 그만한 수고를 할 값을 환상의 시가 가지고 있느냐는 데 있다.
4.
환상에 없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환상이 대상을 대놓고 묘사하기보다 다른 이름으로 제 생각을 드러내려다 보니 할 수 없는 게 제 언어를 꾸미는 일이다. 환상이 읽히기 어려운 이유는 읽기 어렵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렵게 읽어내 보았자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아름다움이 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없다면, 시를 읽을 이유가 이 시대에 있을까? 다름이나 환상으로만 버티기에는 시는 그저 하찮은 언어이다.
현대미술이 지극히 봉사하는 대상은 미술 그 자체가 아니라 대중이고, 특히 구매자인 셈이다. 미술의 구매자들은, 대작(代作)이든 위작(僞作)이든 제가 산 그림이 산 값보다 더 받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한다. 예술의 상품화에 혀를 찬다면, 현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위선에 틀림없다. 사람 자체가 상품인 시대에 사람이 만든 어떤 것이 상품 아니어야 한다고 우길 수 있을까? 시도 상품이 되어야 한다. 상품은 아름다움이 제1 덕목이다.
시가 바라보아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 아닐까? 시도 독자에 값을 해야 한다.
(2016.6.17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