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6

귀납적 탈선, 그 쓸쓸함의 방법 – 류근 [옛날 애인]과 [낱말 하나 사전]

진후영 2016. 11. 11. 18:14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9.9)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일반화하는 귀납적 원리에 의하여 문예 비평이 성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행자의 도움 없이 사실상 자력으로 성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詩學』,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중에서)

 

[옛날 애인]          - 류근

 

이젠 서로 팔짱을 낄 일도 없고

술 먹다 눈 마주치면 그 눈빛 못 견뎌서

벽이나 모텔로 벌겋게 숨어들 일도 없고

심야택시 잡을 일 없고

친구 생일 따위에 따라가 고깔모자 쓸 일도 없고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기다릴 일도 없고

괜히 등산복 사 입고 산에 갈 일 없고

벅찬 오페라에 돈 쓸 일 없고

웃어줄 일 없고

편지 쓸 일 없고

꽃 이름 나무 이름 산 이름 골목 이름 하물며

당신 초등학교 단짝 이름 암기할 필요 없고

슬프고 아픈 척할 일 없고

군대 태권도 1단증 갖고 강한 척할 일 없고

사랑한다 거듭 고백할 필요 없고

없으나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아내여,

 

많은 자료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일반화하는 과정이 귀납적 원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322)는 당대에 축적된 드라마 대본(보통 비극)들을 그리했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 詩學 』은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같은 책, 19)에 더 가깝다고 하지만, 거기 있는 은유이론은 아직도 현대 은유이론의 출발점이다. 그의 시학이 이천사백 년 가깝게 살아남은 힘은 그 귀납적 원리에 있다. 시가 보여주는 기술 가운데 하나가 귀납적 나열이다. 나열되는 사례가 세세할수록 보편적일수록 공감을 얻기 쉽다. 그러면서, 시가 상투성을 벗는 방법은 귀납적 사례들을 뛰어넘는 당혹한 결말을 드러낼 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적 원리에 비교하였지만, 우스꽝스럽겠지만, 귀납적 원리를 활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얻은 것은 그 이론의 생명력이고, 시가 얻은 것은 뜻밖의 충격이다.

 

남녀가 애인에 이르는 과정은 거의 긴 여정이다. 그 여정에 작은 과정들을 많이 쌓을수록 둘의 관계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위 시에 쓰인 것처럼, 팔짱도 끼고, 술 먹다 눈 마주치고, (? 이 부분은 매우 격렬한 상상을 일으킨다. 영화적이랄까?)이나 모텔로 숨어들고, 하다가 그런 과정들이 필요 없는 시기에 이른다. 과정이 필요 없어졌으나,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 사람이 되어 결국 옛날 애인이 된다는 것이 어째 쓸쓸하다. 눈빛 못 견딜 일 없고, 웃어줄 일 없고, 편지 쓸 일 없고, 사랑한다 거듭 고백할 일 없고, 서로 기억이나 보듬는 옛날 애인은 다름 아닌 아내다.

 

화자는 묻는다. 그리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어쩔 수 없었겠지만, 결혼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아직 팔짱 끼고 눈빛 못 견디는 애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아내여, 그럴 수 있었을까?

 

시가 얻은 그것을 귀납적 탈선이라 불러보자. 그 시집에 귀납적 탈선은 더 있다.

 

[낱말 하나 사전]          - 류근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로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내가 버린 한 여자가 설명된다. 가진 게 사전 한 권, 그 안에 내 이름 하나, 세상의 자물쇠를 열지 못하던, 가르쳐줄 수조차 없던, 애달픈 문장들 끝에 걸리는 이름, 어머니!

 

두 시는 똑같은 구조이다. 이와 같으면 시가 쓸쓸해진다.

 

(2016.11.1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