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나이, 늙지 않는 태도 – 김형영 [화살기도]
시집 『땅을 여는 꽃들』 (문학과지성사, 2014.9.30)
“김형영이 서정주의 관능, 고은의 허무주의, 박목월의 초속주의, 김수영의 비판 의식을 거쳐서 발견한 세계는 부정을 통한 긍정의 세계이다. 그가 자기 파괴의 욕망을,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긍정적 시선으로 극복한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를 나는 판단할 수 없다. (중략) 그러나 조주(趙州)의 세계에 있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그가 그래서 쉽게 김춘수의 정경 묘사의 세계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그럴 만한 기대를 걸 수 있는 시인이다.” (김현, 『문학과 유토피아』, 161)
조주(趙州, 778-897)는 중국 선사(禪史) 속 유명한 선사(禪師)이다. 조주가 20세 무렵에 스승인 남전선사(南泉禪師)에게 물었다고 한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시 마음이 도이다.
그러면 닦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조주는 스승의 이 말 끝에 깊은 뜻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얻은 도가 무엇인지 범인으로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주가 훗날 제자를 가르친 방식에서 그가 얻은 도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잔 들게나, 라고 이것저것 따지는 제자들을 넌지시 교화하였다는 조주의 일화가 있다. 그 일화는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얻은 계발의 연장선일 것이다.
비평가 김현(1942-1990)이 김형영의 시에서 본 ‘조주의 세계’도 그런 것이리라.
봄이 뭐라고 중얼대는지
봄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당신들은 모릅니다.
나도 모릅니다. (김형영, [봄] – 김현, 같은 책, 160)
김현은 김형영의 시에서 ‘부정을 통한 긍정의 세계’를 보았다. ‘당신들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는 그것은 그저 모른다는 너머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김현이 말하는 ‘부정을 넘는 긍정’이다. ‘차나 한잔 들게나’라고 제자들의 질문을 지우는 조주의 선의 경지가 김형영의 시에 있다는 분석은 옳다.
이것은 김형영의 두 번째 시집에 대한 김현의 해설이다. 1979년의 일이다. 그 후 30여년, 김형영의 시는 김현이 우려하던 조주의 함정을 벗어났을까?
[화살기도] - 김형영
나를 버릴 곳
나밖에 없다.
개똥밭도 쓰레기통도
내 속마음보다 깨끗해.
손금을 보듯
땅끝 구석구석 다 찾아보아도
나를 버릴 곳
나밖에 없다.
김형영(1944-) 시인은 오래된 시인이다. 등단한 지 50년, 시집은 근간이 9번째이다. 그의 시가 60년대 시작하여, 70년대 저항, 80년대 해체, 90년대 신서정, 2000년대 뉴웨이브, 라는 격랑의 시대를 어떻게 건너왔는지 말하는 것은 내 주제를 넘는다. 그저 근간 시집을 통하여 시인은 시대를 흐르지 않고 머물렀지 않았을까, 거기 기독(基督)적 귀의가 다만 보태지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짚어볼 따름이다. 그 근간에는 고뇌하는 자아가 있고, 자아가 그리는 서정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있다.
욕망이란 인간의 조건이다. 욕망은 제어하기 어렵다. ‘차나 한잔 들게나’라고 조주가 제자들에게 던진 화두는 욕망을 비우라는, 비록 구도(求道)라도 욕망으로는 구도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도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라는 욕망의 다른 말이다. 조주는 그걸 차나 한잔 들게나, 라고 달래준 것이다. 방향을 틀어 준 것이다. 시인은 그와 같이, 나를 버릴 곳, 나의 욕망을 버릴 곳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칠십 노구에, 50년 시를 써낸 이력에, 나를, 그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버릴 곳이 나밖에 없더라고 체득한 셈이다. 김현의 말마따나, 그는 조주의 세계에 어렵게 있다.
2000년대가 열린 지 이미 16년이 더 지났다. 그간 세계는 격변했고, 그 와중에 시 역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았다. 신형철의 비평서 『몰락의 에티카』 중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라는 글을 읽어보면 2000년대 이후 시의 변화를 알기 쉽다. 신형철에 따르면, 시는 ‘서정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였고, 그 확장은 ‘자아에서 주체로', ‘타인에서 타자로’, ‘풍경에서 상처로’, 각각 주체의 확보와 대상의 확장 그리고 자연의 재발견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2000년대 시는 새로운 시학, 새로운 윤리학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the Real)를 실제로 보려는 진일보에 다름 아니다.
“자연을 통해 상처를 서정적으로 치유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위적이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00)
서정에 머무는 것이 과거에 머무는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고뇌하는 자아를, 자연을 동일시의 대상으로 보는 일을 낡은 사고라고만 할 수 없다. 조주의 세계가 이미 선점(先占)된 경지라고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다. 그러나, 새로운 시집에 새로운 시가 없는 것은 낡았다고 하기 충분하다. “좋은 옛것이 아니라 나쁜 새로운 것에서 출발하라는 브레히트의 충고” (같은 책, 203)는 시가, 시인이 내려놓을 수 없는 덕목이지 않는가.
우리 모두 늙어야 하므로, 늙음은 숫자가 아니라 태도가 되는 게 더 낫다.
(2016.11.17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