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에 기여 못하는 권력 – 이근화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
시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창비시선 402, 2016.9.30)
시국이 정말 수상하다.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 투표를 하루 앞두고 있다. 수백만 국민이 여섯 차례나 촛불을 들어 만들어낸 시국이다. 그 가결과 부결을 국회가 가루고 다시 헌법재판소가 판결한다는 법 절차가 우습다. 민의 위에 국회 위에 헌재가 가장 높은 것 같은 법치의 아이러니다. 국회가 제출한 탄핵 혐의에 ‘세월호 7시간’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녀가 통치한 기간,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락한 기간은 천일야화처럼 길었다. 그 가운데 7시간은 어느 한나절만큼 짧지만, 그녀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시간이다. 그 7시간은 잘못된 통치를 상징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탄핵의 제일 요건이다.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을 보다 말았다. 여객기가 강에 불시착하고, 주변 배들이 달려와 탈출한 승객들을 실어내고, 기장은 마지막까지 승객 하나라도 기내에 남지 않았는지 점검하고, 회사 동료가 다친 데 없냐는 질문에 ‘내 승객과 승무원이 모두 155명이야. 그들 모두 구조된 것을 확인한 다음 그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영화적 설정일까? 아닐 게다. 책임감과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 영화는 세월호 비극과 겹치고, 대비된다.
그 7시간 동안 ‘가만있으라’ 했던가? 그리고 그녀는 미용사 불러 머리 만지고 있었다던가? 나머지 시간 뭘 했는지 알 수 없다던가? ‘세월호 7시간’은 권력자의 태만을, 비정을 징벌하는 선례가 되어야 한다. 그녀가 통치한 비극의 최악이 거기 있다.
이근화(1976-)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있다. 전작 세 번째 시집 『차가운 잠』과 비슷한 듯 다르다. 비슷한 점은 두 시집에 ‘일상의 소소한 대상을 시로 형상화하는 경향’이 있다면, 다른 점은 신간 시집에는 죽음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 - 이근화
친정엄마가 미역 다발을 끌어안고 오셨다
미역과 엄마의 키가 거의 같았다
발을 질질 끌었을 것이다 미역도 엄마도
등산 배낭에는 얼리지 않은 소고기 덩어리가
시뻘건 물을 흘리고 있었다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소고기는 제 살에 다리를 달았을 것이다
여섯개의 피곤하고 절룩이는 다리들이
저녁 식탁에 고요히 놓인다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은
눈물 같고 고름 같고 죽음 같다
잊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꿈속의 연인들처럼
고독한 순례자처럼
성지에서 터지는 폭탄처럼
폭력적이고 슬프다
한 방향으로만 한 방향으로만
오늘 꿈속에서 당신이 바짝 마른 얼굴로 앓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미역국을 한그릇 떠서
아슬아슬하게 옮겼다
뜨거운 손가락을 어쩌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서둘러 가기에는 다리가 부족했다
당신은 식탁이 없고 숟가락이 없고
미역국의 기름을 뜨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내 어머니의 노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여섯시가 된다
친정엄마가 미역을 가지고 오는 경우는 애 낳고 나서 더욱 애틋하다. 딸을 낳던 산통을 기억하고, 산후 몸조리가 부족하기 십상이었을 친정엄마는 키가 작고 늙어 구부러져 미역 다발 높이와 거의 같아 보인다. 짊어진 배낭에 소고기 덩어리를 넣고 힘들게 걸어오셨다. 그런데, 화자는 애틋한 어미 사랑을 서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은 눈물 같고 고름 같고 죽음 같다’고 기괴하게 서술한다. 세상을, 일상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 것, 아마도 그것이 이근화식 서정이고 시이다. 세상은 과연 아름다운가? 아름다워서 아름다운가? 이근화식 서정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장을 나와 걷는데 광화문 거리에 노란 리본이 물결쳤어요. (중략) 물속의 어둠은 상상할 수 없고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축하는 이어지고 또 언젠가는 예고 없는 죽음이 우리를 추격하겠지요.” ([내 죄가 나를 먹네] 일부)
“땅이 두부처럼 갈라졌다고 했다. 무른 땅을 디딜 발이 사라졌다고 했다. 네팔의 국기가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삼천명이 죽었고 일만명의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했다.” ([두부처럼] 일부)
“버스가 뒤집혀서 연수생들이 죽었어요, 시끄러운 중국말로 사람들은 국제전화를 돌렸겠지요, 오이냉국을 마시다가 수박을 쪼개 먹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이 귓속에 꽂혔을 겁니다.” ([새의 가슴] 일부)
세월호 참사에서, 네팔 지진에서, 중국 연수생 버스 사고에서, 죽음은 사람들이 일상을 사는 가운데 불현듯 나타난다. ‘오이냉국 마시다가 수박을 쪼개 먹다가’ 들이닥치는 느닷없는 죽음은 오이냉국도 수박도 세상살이 아무 맛도 잊게 만들 수 있다. 산 목숨은 우연의 연속이고, 죽음은 언제나 확률이다.
친정엄마가 당신 키만한 미역을 끌어안고, 배낭에 소고기 덩어리를 무겁게 지고 오셔도, 화자가 눈물 겨운 건 어미의 끈끈한 사랑만이 아니라 제 주변을 감싸는 죽음의 그늘이 또한 버겁기 때문이다. 왜 ‘당신은 식탁이 없고 숟가락이 없고’, 당신은 미역국 기름 한술 뜨지 못하는가?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은 눈물 같고 고름 같고 죽음 같은’ 이유가 ‘내 어머니의 노란 얼굴’과 겹치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이여, 죽음의 확률에서 벗어나시라!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을 화자는 안다. 이근화식 서정이 기괴한 이유가 거기 있다.
그 죽음의 확률을 낮추는 기능이 국가이다. 위급할 때 국가가 기능하도록 통치해야 하는 권력을 머리 편하게 올리고, 주사 맞고 제 얼굴이나 탱탱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면, 탄핵뿐 아니라 돌팔매를 맞아야 한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2016.12.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