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작별과 사별은 다르다 – 김혜순 [날씨님 보세요]
시집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480, 2016.3.3)
“좋은 비유는 관계가 먼 사물을 끌어다 붙여 대질시킬 때 얻어진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25)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진정한 천국을 이루려는 한 인간의 헌신적 행보를 그려낸다. 그 소설은 주인공 ‘조 원장’을 통하여 소록도 나환자들이 도달한 ‘당신들의 천국’을 말한다. 비교가 좀 뭐 하지만, 비평은 비평을 통하여 ‘당신들의 천국’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시의 비평을 읽고, 독자는 시가 아름답다는 것을 더욱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평을 통하여 시인과 독자와 비평가가 함께 도달하는 ‘당신들의 천국’이다. 한국 비평은 참여자들을 위한 ‘당신들의 천국’에 헌신하고 있는가? 아마도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시보다 비평이 더 어렵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비평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평이 비평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독자를 향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시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하더라고, 비평은 시의 의미와 형식을 설명하는 역할에 충실할 때 올바르다. 비평으로 시의 아름다움을 더욱 읽어낼 수 있을 때, 비평 역시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평은 시를 독자에게 해설하는 글이다. 그 이상은 그것을 얻으면서 달성되는 군더더기이다.
비평이 상찬하는 시 혹은 시집이 독자에게 읽히는 시 혹은 시집이기 어려운 경우도 비슷하다.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가 그러하다. 시집 뒤 해설을 쓴 권혁웅은 ‘한국 현대시가 여기에 이르렀다’고 감탄하였지만, 황현산 선생은 ‘아무리 깊이 뜯어 읽어도 다 뜯어 읽기 어려운 시집’이라 상찬하였지만, 과연 독자가 그 시집을 기쁘게 읽어낼 수 있을까? 비평가들이 말하는 잘 쓴 시가 독자들이 읽기에 좋은 시가 아닐 수 있다. 비평의 선구안은 늘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비평과 독자 사이에는 괴리가 있고, 잘 쓴 시가 좋은 시에 닿는 데는 모자람이 또한 있다. 그 괴리를 줄이고 모자람을 채우는 일이 비평의 부담이고 또한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시와 비평과 독자는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려는 동반(同伴)이다.
[날씨님 보세요] - 김혜순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달이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하는 달과 나인 척하는 나무가 살랑살랑 대화를 나누는 달밤.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빗줄기가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하는 비와 나인 척하는 우산이 주룩주룩 대화를 나누는 밤.
눈물이라는 거울을 눈동자 위에다 내뿜으며 나는 재빠르게 중얼거린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100번 반복한다. 우리가 살다 간 집이 한 번도 공기를 바꾸지 않고 문 닫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거기서 살았던 걸까, 그 집 무너지면 우리는 어디에 남을까. 바람인 척하는 귀신과 구멍인 척하는 귀신들이 흐느낀다.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 날씨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린다.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빈집이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 하는 빈집과 나인 척하는 먼지가 사그락사그락 대화를 나누는 새벽.
신형철 비평가의 『몰락의 에티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412) 신형철은 그 둘 가운데 작별을 훨씬 시적이라 꼽는다. 그것이 이별 후 그리움에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후회를 보태어 복합감정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은 사별(死別)에 견줄 바는 못 된다. 이별이든 작별이든 산 자들의 일이고, 살아있는 한 헤어진 자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去者必返) 희망이나마 품을 수 있다. 사별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위 시는 사별하고 난 이후에 부르는 연애시다. 이별이든 작별이든 사별이든 당신이 부재한 것은 현실이나, 사별은 회복의 희망이 전혀 없는 부재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인 척하는 것만 있고 나인 척하는 것만 있다. 당신인 척하는 것과 나인 척하는 것만 있을 따름인 그 ‘척’들의 기척은 아프다. 전화가 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분명 저 달이 당신 흉내를 내는 것이리라. 아무렇지 않은 듯 반응하지 않지만, 나는 내심 어떤 기적일 수 없을까 흔들린다. 그렇게 당신인 척하는 저 달과 나인 척하는 나무가 살랑살랑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당신인 척하는 것은 빗줄기고 나인 척하는 것은 우산이다. 당신인 척하는 것은 빈집이고 나인 척하는 것은 먼지다. 빗줄기에 우산이 주룩주룩 대화하고, 빈집에 먼지가 사그락사그락 대화하는 그 ‘척’들의 기척은 사무친다.
시집에서 떼어낸 이 시를 그저 사별한 자의 연애시로 읽어도 좋겠다. 사별이 한탄하는 죽음에서 시집이 향하는 여성성의 핍박의 사례를 읽든 말든 그것은 호사가들의 임무이다. 독자는 그저 연애시의 문법으로 사별의 감상(感傷)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가슴 저미는 이야기에 벅차면 그뿐이다.
“눈물이라는 거울을 눈동자 위에 내뿜으며”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 날씨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린다.”
보통 눈동자를 보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 말하기 쉽다. 시는 눈물을 거울이라 하고, 그 눈물이라는 거울을 눈동자 위에 내뿜는다고 말한다. 즉, ‘(눈물=거울)≠눈동자’는 특이한 비유이다.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 것은 ‘나의 이마'가 되어야 한다. 시는 그것을 ‘날씨의 이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나인 척하는 다른 것이 아픈 것이라는 연애시의 시치미에 기인한다. ‘(날씨의 이마=열) vs. (비=물수건)’는 복잡한 비유이다. “좋은 비유는 관계가 먼 사물을 끌어다 붙여 대질시킬 때 얻어진다”는 황현산 비평가의 말에는 새로운 비유가 좋은 비유이고, 좋은 비유가 잘난 비유일 것이라는 가정이 숨어 있다. 좋은 비유란 그 상황에 잘 어울리는 비유면 족한 것 같다.
가령, 당신인 척하는 ‘저 달, 빗줄기, 빈집’ 그리고 나인 척하는 ‘나무, 우산, 먼지’ 라는 은유가 사실은 더욱 좋은 비유 같다. 그것들은 그 상황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2017.1.30 진후영)
[사족]
시에서, 시집 한 권에서 문법적 오류가 눈에 띄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시와 시집에는 시인과 편집자의 내공이 깊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잔뜩 치켜세운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 돼지』에 문법적 오류와 편집 상 오류가 눈에 띄는 것은 의외다. 위 시 [날씨님 보세요]의 마지막 구절에 ‘척 하는’은 띄어 쓰든 붙여 쓰든 둘 다 가능하다지만, 시의 앞에서 모두 붙여쓰기를 한 것으로 미루어 붙여 쓰는 것이 옳다. 예시는 시집에 실린 그대로 놔두었다. 또, 시집 목차에 메모하다가 본문과 순서가 바뀐 목차를 발견했다. ‘결혼기념일 161쪽’과 ‘나의 어제는 윤회하러 가버리고 164쪽’은 본문과 순서가 바뀌었다. 분명 편집 상 실수이다. 복잡한 시집을 편집하는 와중에 시인과 편집자가 놓쳤겠지만, 그만큼 옥의 티를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