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연민과 해학과 반성의 세계 – 이정록 [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진후영 2017. 2. 7. 19:41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시선 404, 2016.11.4)

 

웃기는 시를 쓰고 싶었다. 감동이 아니라면 재미라도 있어야지, 내 시 창작법의 전부였다.” (이정록, [실소] 중에서)

 

이정록(1964-) 근간 시집은 재미있다. 4부로 나뉜 그 시집은 서정시의 어조 가운데 가장 살가운 연민과 해학으로 꾸며져 있고, 더러 반성이 끼여 있다. 연민과 해학의 어조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눈길을, 반성의 어조에서 그 조화로운 경지에 닿지 못하는 저 자신을 향한 후회를 읽을 수 있다. 연민과 해학 그리고 반성은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주고 받는 살 만한 세계의 풍경들을 말하고 있다. 살 만하여 살 만하다기 보다, 연민과 해학 그리고 반성으로 치장해 놓고 보니까, 세상은 그렇게 또 살 만한 품격이 있어 보인다.

 

이문구(1941-2003) 소설가는 충남 보령 출신이고, 이정록 시인은 충남 홍성 출신이다. 그 두 지역이 얼마나 지척인지 모르겠지만, 시에 이문구 선생께서 들르시던 인정식당” ([츰 봐] 중에서) 운운하는 것처럼 이정록 시인은 선생을 흠모하는 것 같다. 선생이 소설로 충청도 사투리와 그들의 살 만한 풍경을 해학 넘치게 그려냈다면, 시인은 시로 그걸 해내려 한다. 시인이 웃기는 시를 쓰고 싶었다라는 말은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 시를 무겁지 않게 쓰고 싶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문구 소설처럼 살 만한 풍경을 제 시에 담아내고 싶다는 시론(詩論)이다. 그의 근간 시집에서 2부는 해학적 시를 모아놓았는데, 그것들은 감히 견주어 이문구 소설 『관촌수필』에 버금가지 싶다.

 

2부에서 한 편을 골라본다.

 

[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 이정록

 

- 이게 마지막 버스지?

- 한대 더 남었슈.

- 손님도 없는데 뭣하러 증차는 했댜?

- 다들 마지막 버스만 기다리잖유.

- 무슨 말이랴? 효도관광 버슨가?

- 막버스 있잖아유. 영구버스라고.

- 그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 살짝 귀띔해줘. 아예, 그 버스를 영구적으로 끌든지.

- 아이고. 지가 졌슈.

- 화투판이든 윷판이든 지면 죽었다고 하는 겨. 자네가 먼저 죽어.

- 알았슈. 지가 영구버스도 몰게유. 본래 지가 호랑이띠가 아니라 사자띠유.

- 사자띠도 있남?

- 저승사자 말이유.

- 싱겁긴. 그나저나 두 팔 다 같은 날 태어났는데 왜 자꾸 왼팔만 저리댜?

- 왼팔에 부처를 모신 거쥬.

- 뭔 말이랴?

- 저리다면서유? 이제 절도 한채 모셨고만유. 다음엔 승복 입고 올게유.

- 예쁘게 하고 와. 자네가 내 마지막 남자니께.

 

텅빈 시골 버스에서 기사와 할머니 대화가 우습다. 버스기사는 할머니에 한참 못 미친다. 짧은 대화 동안 세 번이나 할머니 말부리에 거듭 쪼인다. ‘(영구버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줘’, ‘(졌으니까) 자네가 먼저 죽어’, ‘예쁘게 하고 와. 자네가 내 마지막 남자니께’, 라는 삼세판에서 할머니 수가 한참 높다. 마지막 버스에서 영구버스로, 사자띠에서 저승사자로, (팔이) 저리다에서 절()이다로, 버스기사는 고작 말꼬리로 재주를 부리지만 할머니 말부리에 거듭 걸린다.

 

그러나 아마도 슬픈 것은 할머니일 것이고, 즐거운 것은 버스기사일 것이다. 말재주로 암만 버스기사를 깔아 뭉개었어도, 마지막 버스에 먼저 오를 순서는 할머니에 가까울 터이다. 고작 말꼬리로 버텨보려다 번번히 할머니의 말부리에 쪼였어도, 버스기사는 빙그레 웃고 말았을 터이다. 암만해도 지가 젊지유?

 

버스는 충청도 어느 마을을 향해 털털거리며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달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을 것이고, 캄캄한 차창에 두 얼굴이 따로 비추고 있을 것이다. 두 얼굴이 늙고 젊다는 차이는 있어도 표정은 비슷할 것이다. 두 얼굴은 밤길을 비추는 버스의 두 줄기 빛보다 더 빛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이정록 시는 세상과 사람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2017.2.7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