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세상의 딸들에게, 감히 – 이정록 [문상]

진후영 2017. 2. 12. 23:24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시선 404, 2016.11.4)

 

[문상]          - 이정록

 

입던 옷 그대로 달려와서 미안하네. 얼마나 가슴 아프대? 누워 계신 지 십년 넘었지? 그나저나 오징어는 좋을 거여. 갑작스런 부음에도 먹물 뒤집어쓰고 곧장 장례식에 달려갈 수 있으니께. 몸 안에 늘 검정 옷을 갖추고 있잖여. 목 놓아 울다가 넋이라도 빠져나갈라치면 빨판마다 온갖 설움 움켜잡고 바닷물에 훌훌 헹굴 수도 있으니께 말이여. 내가 참 실없네. 헌데, 누군들 가슴속에 검은 상복 한벌 없갔어? 갈비뼈 석쇠가 새까맣게 타버렸지. 십년이면 간병한 자네나 가신 분이나 빨판은 다 닳은 거여. 훌훌 잘 가실 거여. 한잔 받어.

 

장인 어른이 위독하시다. 오랜 지병이 근래 몇 년간 거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시집 안 간 사십 줄 막내딸이 그 기간 늙은 아비를 극진히, 아니 곁에서 보기에 난감하게 간호했다. 아비가 늙는다는 것은, 아비가 병든다는 것은 순리(順理)가 아니라 역리(逆理). 앙앙 울던 간난 아이였을 적으로 아비를 되돌리고, 막내딸은 어미가 되어 먹여주고 똥싸게 해주고 밑까지 닦아준다. 아비는 존엄을 이미 잃었고, 추억을 나눌 분별도 이제 없다. 아비에게 남은 것은 목숨이 요구하는 본능 하나처럼 보인다. 노환과 질환의 고통은 아비의 몫이지만, 아비가 지르는 고함이나 투정에 더욱 앓았던 것은 막내딸이었던 것 같다.

 

중환자실로 장인 어른을 옮겨야 했다. 병실 간호를 하던 막내딸과 셋째 딸 짐을 옮겨주러 둘째인 아내와 병원을 갔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의식 없는 아비를 잠시 보고 나온 아내는 병원을 나오는 주차장 문턱에서 무너져 운다. 가슴을 치며 운다. 아내가 우는 이유, 가슴을 치며 우는 이유가 별난 것은 아니다. 어느 딸이 제 아비가 아주 무너지는 날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까? 가족을 잃는 일은, 특히 아비를 잃는 일은 누가 말했듯이 너무 늦은 것을 향해 달려가는그런 모습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후회와 한탄만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딸이 가슴을 치며 우는 이유는 눈에 담았던 것을 이제 가슴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슴의 문을 열기 위하여 두드릴 곳은 가슴 아니겠는가? 아내는 이제 아비를 가슴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 셈이다.

 

이정록의 [문상]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상 가서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절만하고 나오기 일쑤이다. [문상]에 쓰인 언술처럼 뜬금없이 오징어를 끌어다가, 먹물을 검은 상복으로, 빨판을 설움까지 붙잡는 의지로, 바닷물을 슬픔까지 헹궈내는 시간으로 비유하는 넉살을 부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막역한 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의 상상력이 말을 멋부린 터이다. 시는 아름답지만 그 상황이 실재라고 보아주기는 어렵겠다.

 

진짜 슬픔은 그런 말에 있지 않다. 아비를 잃는 슬픔은 딸의 얼굴에서만 읽힌다. 진짜 슬픔은 그들이 두드린 가슴에, 그 보이지 않는 멍에 자국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세상의 딸들이여, 제 가슴을 두드려 이제 문이 열린 것을 아시라. 그 문으로 아비가 기쁘게 들어서고 있으려니, 여기시라.

 

 

(2017.2.1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