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행복했어요, 말하려면 – 허연 [권진규의 장례식]

진후영 2017. 2. 28. 20:44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4.28)

 

1.

  장인 어른 장례를 마쳤다. 세상 일은 처음 하는 것들이 어렵다. 당신도 처음 가시는 것이고, 아비를 잃은 네 딸들과 아들, 그리고 남은 장모 또한 그만한 슬픔이 처음이다. 처음이라 장례는 버겁다. 상조회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사소한 일 굳은 일을 예법과 절차를 간단하게 엮어 경황없는 유족을 이끌어 주었다. 예법에 없는 기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 제일은 망인에게 편지 쓰기였다. 손주, , 사위, 아들, 아내로서 잠깐 정신을 가다듬어도 망인을 향한 편지는 말 그대로 눈물 범벅이었다. 그 편지들을 염할 때 망인의 품에 넣어 두었다. 가시는 길 심심하지 않으시겠다.

 

  그런 상황에 나는 사위이다. 고인을 사랑해도 자식과 아내에 못 미치고, 슬퍼도 또한 비교가 안 된다. 그 편지들은 망인을 위한 것이지만, 가족을 위한 기념이 되도록 하고 싶었다. 사위만 낼 수 있는 경황(景況)일 것이다. 나는 상조회사와 가족들 몰래 핸드폰으로 편지들을 사진 찍어 두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그 사진들을 읽어 보았다. 모두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망부(亡父) 망부(亡夫)한 사연들이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단순한 진심에 있다. 장모의 한 줄 문장이 그와 같았다.

 

  “여보, 사랑해요. 행복했어요.”

 

  망인에게 가장 기쁜 순간일 지 모른다. “행복했어요.” 망인에게 가장 슬픈 말일지 모른다. “행복했어요.” 떠나며 기쁘다면 함께하여 행복했다고 하기 때문이리라. 떠나며 슬프다면 또한 행복했다고 하기 때문이리라. 그때 행복과 슬픔은 같은 것에 틀림없다.

 

  그런 날이 오면, 그렇게 말하도록 하자. “행복했어요.”

 

2.

[권진규의 장례식]          - 허연

 

비가 내렸습니다.

 

권진규 씨는 허름한 옹이 박힌 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시들지 않을 것 같은 꽃은 모차르트가 들고 왔습니다. 잉크가 번져 얼룩진 리본에 “내 정신이 너의 가슴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여섯 명의 조객 중엔 천재도 범인도 바보도 있었습니다. 하관이 끝나고 빗줄기가 굵어지자 붉은 황토물이 그들의 발을 적셨고 갑자기 모차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허연(1966-)의 시집에는 개인적 감상들이 그득하다. 내가 읽은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2009)와 네 번째『오십 미터』(2016), 그리고 이번에 읽는 세 번째 『불온한 검은 피』(2014)는 거의 같은 감상이다. 시가 시인의 감상일 수밖에 없더라도, 그의 시적 특징을 개인적 감상이라 집어 말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대개 기억의 편린들이고, 다만 기억 속에서 편집된 개인적 감상이기 때문이다. “서정시의 본질적 시제는 현재” (김준오, 『시론』, 44)라고 한다현재의 감각은 과거의 체험이 바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인간은 체험을 통하여만 현재를 감각한다. (과거의) 체험은 더욱더 축적되고, (현재의) 감각은 조금씩 넓어진다. 허연이 다른 지점이 여기다. 그의 개인적 감상들, 그러니까 체험들은 현재를 감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감각하는데 머무는 것 같다. 거기까지만 말하는 것인지, 그 이상을 안 보는 것인지, 허연은 이번 시집에서 특히 과거를 감각한다. 마치 현재나 미래가 없는 듯한 감각은 그저 허무하고 쓸쓸하다.

 

  [권진규의 장례식]은 그러한 과거의 체험의 감각이다. 그가 체험한 허무가 시가 되는 이유는 그가 은유를 잘 부리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은 슬픈 은유로 가득하지만 그의 은유는 사람을 배반하거나 인간에게 심술을 걸기 위한 수사로 머무르지 않는다.” (김경주, 시집 뒤 해설, 116) 김경주 시인이 말하는 사람을 배반하거나 인간에게 심술을 거는은유란 당혹한 비유를 말하리라. 은유는 낯익을 수도 낯설 수도 있다. 그것들을 병치은유와 치환은유로 구분하든 하는 것은 이론가들의 호사이다. 허연의 은유는 적당히 낯익고 적절히 낯설다. 그것들은 독자가 직관적으로 느낄 만큼 쉽고 동시에 모호하다. 위 시에서 꽃은 모차르트가 들고 왔습니다할 때, ‘꽃은 모차르트라는 은유가 되고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의 어느 음악을 뜻하는 제유지만, 이 언술의 주력은 꽃과 모차르트 음악이 병치되는 은유 개념이다), 다시 빗줄기는 모차르트라는 은유가 된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모차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고 있었습니다라는 언술은 허연 시가 건네주는 낯익고 또한 낯선 감각이다.

 

  [권진규의 장례식]슬픈 은유로 만든 과거의 감각이다. 그의 시는 과거에 머문다. 그것은 그대로 슬픔이다. 그런데, 그가 암만 과거에 머물러도 독자는 자꾸 현재를 감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허연은 슬픈 과거를 감각할 뿐 아니라, 뜻하지 않게 현재에 닿는 셈이다. 어쩌면 그의 시가 실패하는 또한 성공하는 지점이 여기이다. 독자들은 그의 과거에서 현재를 환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17.2.2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