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슬픔 – 도종환 [해장국]
시집 『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2016.10.21)
탄핵정국이 끝났다. 4년을 못 채우고 박통이 쫓겨났다. 아비를 변고로 잃고, 그 딸마저 같은 직위를 놓친 것은 집안의 불행을 넘어 국가적 업보에 가깝다. 탄핵은 촛불집회가 이루어낸 민주(民主)의 역사로 기록되겠지만,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언제나 슬픈 자국이 보인다. 민주주의는 합일이 불가능한 속성을 갖고 있다. 탄핵정국 동안 태극기가 혐오의 상징에 가까워졌고, 노란띠를 깃봉에 따로 매지 않으면 태극기가 온전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후유증이다. 삼성동 그 집 앞은 연일 태극깃발이 휘날린다. 그 길바닥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마’라고 통곡하는 아직 백성도 있다. 그런 현상은, 현대사의 험한 질곡을 건너는 가운데 먼 과거나 향수하는 소외된 자들의 퇴행이라고 말해진다. 진단은 쉽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고,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어렵다.
적과 싸우는 것보다 무지와 싸울 때 더욱 힘겹다. 적에게는 저항할 수 있지만, 무지는 난감한 대상이다. 근원적 벽이다. 불교에서 12지연기론의 첫 단계가 무명(無明 – 무지와 같은 말)이고,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고(苦)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방법이 무지를 깨는 일이라고 한다. 무지의 극복은 불교적 궁극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소승(小乘)은 제 무지를 우선 깨려 하고, 대승(大乘)은 세간의 전체 무지를 깨겠다고 서원한다. 대승적 해탈이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 이상 역시 아름답지만, 그것들은 기약할 수 없는 슬픈 이념이다.
무지에 대한, 무지로 인한 탐욕에 대한 문학의 태도는 전통적으로 계몽이다. 현대시에서 무지나 탐욕을 계몽하겠다는 헛된 포부를 찾기는 어렵다. 시인의 자격은 있어도 선생의 자격까지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시는 대신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 오늘날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계몽일 지도 모른다.
[해장국] - 도종환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가 여기 있다
밤새도록 벌겋게 달아오르던 목청은 식고
이기지 못하는 것들을 안고 용쓰던 시간도 가고
분노를 대신 감당하느라 지쳐 쓰러진 살들을
다독이고 쓰다듬어줄 손길은 멀어진 지 오래
어서 오라는 말 안녕히 가라는 말
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
주방장이면서 주인인 그 남자가 힐끗 내다보고는
큰 손으로 나무 식탁에 옮겨다놓은
콩나물해장국 뚝배기에 찬 손을 대고 있으면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듯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랴
떨어진 잎들이 정처를 찾지 못해 몰려다니는
창밖은 가을도 다 지나가는데
사람에게서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는 날
해장국 한그릇보다 따듯한 사람이 많지 않은 날
세상에서 받은 쓰라린 것들을 뜨거움으로 가라앉히며
매 맞은 듯 얼얼한 몸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한숟갈의 떨림에 가만히 눈을 감는
늦은 아침
시인은 왜 해장국에서 위로를 찾고 있을까? 시인하는 감수성 탓일까?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는 도리일까? 민주주의를 살아내는 대가일까? 사람으로 살아가는 업보일까? 가고 싶은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해장국은 위로가 되기는 하는 걸까? 시는 아름다울까?
그렇게 질문을 찾는 가운데 시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조금 계몽되었다.
(2017.3.2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