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는 재건축이다 – 이성복 [1959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초판 44쇄 – 2012.9.17)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는 80년대 한국시를 ‘해체’했다고 한다. 이성복 첫 시집을 읽으면서, 해체가 무엇인지, 한국시 가운데 이성복이 시를 어떻게 해체했는지 궁금해진다.
해체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1930-2004)가 1966년 서양 철학 기조를 허구라고 선언하면서, 다시 말하여 서양 철학의 근간에 저항한 현대 철학 이론이다. 데리다가 해체한 서양 철학의 근간이란 ‘이원론’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과 희극의 이원, 칸트의 이성(우위), 헤겔 변증법의 정(正)과 반(反)은 데리다가 해체한 서양 철학 이원론의 사례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 우위를, 칸트는 이성 우위를 강조하였고, 헤겔 역시 변증법이라는 정(正)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이원론자였다고 데리다는 분석한다. 실재 세계에는 비극과 희극이 혼재하고, 로고스(이성, 진리)로 파토스(감정, 혼돈)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배 논리이며, 변증법이 정과 반을 반복하여 도달하려는 절대정신은 허구라는 것이다. 가령, <이성/감정>, <선/악>, <기의/기표>, <무의식/의식> 등등 둘씩 구분하면, 좋은 것은 이성·선·기의(말의 의미)·무의식 등 왼쪽 것들이고, 나쁜 것은 감정·악·기표(말의 소리)·의식 등 오른쪽 것들이다. 좋은 것은 도달해야 할 질서가 되고, 나쁜 것은 벗어나야 할 혼돈이 된다. 이원론은 도그마에 빠지는 지극히 위험한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이다. 선/악을 구분하고 선(좋다고 여기는 것)에 치중하는 도그마의 극단적인 사례가 나치즘이라면, 이원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데리다는 서양 이원론을 해체하여 서양 철학이 실재 세계를 실재로 보도록 개시(開始)한 셈이다. (위는 『데리다 입문』, 김보현 지음, 을 일부 요약한 것이다. 인용이 아니므로, 오독은 전부 내 탓이다.)
데리다가 서양의 이원론을 해체하였다면, 그리하여 세상을 둘로 편 가르지 않고 편향하지 않는 시선을 유도하였다면 (데리다의 해체는 통쾌한 이론이지만, 서구 헤게모니가 장악한 세계는 해체보다 이원론의 강화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러니!), 80년대 한국시는 해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질문은 내 주제를 한참 넘는다. 짧은 이 글의 범위 바깥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성복의 해체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시 한 편에 어떻게 시현되어 있는지 살피는 정도로 자족(自足)한다.
[1959년] -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妊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 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1980년대의 해체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준 첫 번째 시집이다. 1980년대 벽두에 이성복의 시는 기상천외한 이미지들의 돌출과 당돌한 결합, 언어의 파격성, 세계의 산문적 개진, 끝없는 요설, 가차없는 우상 파괴 등으로 새로운 해체 시법의 한 전범으로 떠오른다.” (장석주,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인터넷에서 퍼온 것으로 정확한 언술인지 불확실함)
위 평가 중에서 ‘기상천외한 이미지들’부터 ‘끝없는 요설’까지는 시의 형식 면을, ‘가차없는 우상 파괴’는 시의 내용 면을 해체한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이성복의 시가 형식 면에서 파격인 점이 없지 않지만, 그 정도는 1930년대 이상(李霜)이 [오감도]를 신문에 연재할 때 충격에 못 미친다. 김수영이 ‘세계의 산문적 개진’이나 ‘요설’로 1960년대 이미 성과를 내놓은 바 있다. 이성복 시가 형식을 해체하였다고 감격하는 일은, 선행주자들이 선점한 형식보다는 그가 시에 구현한 수사(修辭)의 다름에서 찾는 일이 타당하다고 본다. 위 시에는 이성복 시가 성취한 수사적 기술 – 제유적 나열이 있다.
‘봄은 오지 않았다’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로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어머니는 살아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제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드러내는 기법이다. 이성복의 첫 시집에 많은 시들이 그러한 것처럼, 위 시는 봄·살구나무·성기·의사들·어머니·여동생 들이 대상들로 나열되고, 대상들의 일상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 뛴, 봄을 상실한 듯 혼돈과 부조화를 보여준다. 시적 주체인 우리들은 ‘봄이 아닌 윤리’(이 말을 희망 없는 거짓 윤리로 읽을 수 있다)와 ‘사이비 학설’(이 말을 삶의 진면목을 밝히지 못하는 학설로 읽을 수 있다)과 싸우다가 ‘보이지 않는 감옥’(자기 세계 혹은 현실 거부)으로 자진해서 간다는, 우리들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대상들이 드문드문 세상의 부분을 혼돈과 부조화로 보여주며, 시적 주체인 우리들이 세상의 혼돈에 저항하는 태도를 그려낸다. 위 시는 세상이 혼돈할 뿐이라는 제유적 현상을 나열하는, 시집의 첫 장을 장식하는 서시이며, 이성복 첫 시집의 주요 특징을 품고 있다. 이성복 시의 제유적 나열은 사례가 없던 것이라 ‘기상천외한 이미지들의 돌출과 당돌한 결합, 언어의 파격성, 세계의 산문적 개진, 끝없는 요설’로 읽힐 수 있지만, 이성복 시가 형식의 파격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제유적 나열이 다만 낯선 것이다.
이성복 시가 달성한 해체는 내용에서 깊다. ‘가차없는 우상 파괴’나 ‘권위에 걸맞은 도덕성과 힘을 결핍하고 있는 아버지’의 부정, 즉 부성으로 대표되는 ‘세계를 지배하는 권위와 우상의 상징’을 해체한다고 하는 해석은 오독에 가깝다. 이성복 시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성복은 그런 전통적 가족 역할을 쓸쓸하게 표현할 뿐 해체하지 않는다. 위 시에도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정작 그들의 기쁨을 짓이기는 것은 화자라고 말해진다. 화자인 ‘나’와 주체인 ‘우리들’이 무기력과 불감증으로 절망하는 이유는 현실이 혼돈이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가 내용에서 다른 지점이 여기이다. 시가 희망을 희망하지 않는, 삶을 혼돈과 부조화로 읽어내는, <선/악>이나 <미/추> 에서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휠씬 실재라고 알아채는, 그것을 한국시에 처음은 아닐지 몰라도 전폭적으로 드러내는, 그 지점에서 이성복은 시를 해체한다.
한국시에 이원론을 해체하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 한국 철학에 서양 이원론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도, 데리다의 해체가 현실의 진면목을 바로 보려는 철학적 성찰이라면, 이성복 시는 1980년대 한국 현실이 어두웠다는, 아니 인간 삶의 실재가 그러하다는 시적 해체이며, 수사적 재건축이다. 나는 그렇게 읽는다.
(2017.6.16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