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새로운 것의 조건 – 서정학 [인스턴트 사랑주스]

진후영 2017. 9. 15. 09:58

시집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8, 2017.5.30)

 

  “서정은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공인된 기율이다. 옹호되어야 하는 것은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지 이미 공인된 지 오래된 미학적 기율이 아닐 것이다. (…) 서정은 옹호되기보다는 갱신되어야 한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62)

 

[인스턴트 사랑주스]          - 서정학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뜯었다. 날은 추워지고 또 몸은 젖었으니 그것 밖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몇몇은 기대에 찬 얼굴로, 또 다른 몇은 의심을 가득 담고 또 몇은 관심 없다는 듯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지만 모두들 눈은 손에 든 봉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은 사람 키 높이까지 쌓아 올린 캠프파이어 모닥불처럼 3분 만에 활활 타올랐다. 누군가 인스턴트라서 금방 꺼질 거라고 했지만 쉽게 꺼지지도 않았고 제법 쓸 만했다. , 애초에 사랑이란 게 그런 거 아니었나. 금방 타오르고 금방 꺼지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이 보급받은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챙겨올 수 있었던) 종이상자 속에는 몇 봉지나 더 들어 있었다. 밤은 멀고, 우리는 봉지를 하나둘, 씩 뜯어 물을 붓는다. , 너희끼리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마라. 사랑은 그런 게 아닌 걸 우린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잘 빻아서 가루가 된 사랑에 물을 붓고 잠깐 기다리는 게 이 상황에서 정답인 것도 잘 안다. 그리고 그런 게 그런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활활, 활기찬 이 얼굴들은 모두 3분짜리라는 것도.

 

서정학 (1971-) 시인의 두번째 시집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는 기존 서정시의 문법을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서정시가 싫은 것이 아닐 것이다. 유행가는 있어 온 이래 사랑을 노래해도 언제나 유행한다. 뽕짝에서 통키타로 락에서 힙합으로 다른 양식을 갈아입어도 사랑은 언제나 노래된다. 그것은 듣는 젊음이 갱신되기 때문이고, 적어도 양식이 바뀌어 새로운 노래로 들리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좋다 아니다는 엇갈림에는, 독자의 입장에서 서정에 크게 개의치 않을 거라도, 시인의 입장에서 필연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갈아입겠다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불균형이 있다. 예술가는, 유행가에서 시까지, 새롭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는 강박증을 갖게 마련이다.

 

서정학 시인의 주장은 이와 같다. “라디오에서 읽어주는 엽차 같은 시”(15)익숙한 결론”(9)이 문제다. “일상은 편집되지도 않고 축약할 수도 없고 당연히, 간단히 무심히 설명할 수도 없다.”(10) 서정시란 일상을 편집하고 축약하고 설명하는 감상(感想)이며,  말하자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가상(假想)이다. 그렇다면, 편집되지도 않고 축약할 수도 없고 당연히, 간단히 무심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상을 편집하지 않고 축약하지 않고 당연히, 간단히 무심히 설명하지 않는 시로 쓸 수 있는가? , 서정학 시인은 서정시를 극복할 방법이 있는가?

 

싱겁게도 서정학 시인도 딱히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도 시를 쓰고, 일상을 쓰고, 그 일상은 편집, 축약, 설명되는 범위를 아주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 그의 시집에서 그가 보여주는 방법은 일상을 편집, 축약, 설명하지 않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비켜가는 방법 아닌 방법이다. 그것은알레고리.

 

위 시를 읽어보자. 언뜻 이상하지만, 시는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면 되는 무엇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3분짜리 인스턴트 주스 같지만, 사랑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3분짜리라는 것은 짧은 시간 감동을 주는 사랑 - 시 같은 것이다. 그 사랑은 독자의 시에 대한 사랑이다. 독자가 어떤 시를 사랑하는 것은 짧은 감동을 받기 때문이고, 독자의 사랑을 받아 짧게 타오르는 시는 3분짜리 인스턴트 주스와 다르지 않다. 시는 쓰이는 것이며, 동시에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너희끼리 사랑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시가 말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읽히는) 사랑을 벗어나며, 우문이다. 위 시는 3분짜리 인스턴트 주스 만들기를 말하지만, 내심 시의 속성을, 서정시에 대한 사랑의 속성을 우화(寓話)하는 알레고리이다.

 

일상을 일상과 같게 말할 수 없다면, 말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말할 수 없을 때, 말하는 방법이 비유이고, 그 가운데 알레고리는표면적으로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의미를 숨기고 말하는 방법이다.

 

‘서정은 갱신되어야 한다는 말은 시가 추구해야 할 한쪽일 때 옳다. 나머지 쪽에는 독자가 있다. 새로운 것은 새롭게 나타나지만, 새로운 노래는 언제나 관객이 함께 좋아해야 노래가 된다. 새로운 시 역시 독자가 감수(感受)할 몫이 있다. 서정은 독자를 향하여 갱신되어야 한다. 서정학의 서정시 갱신이 실패하는 지점은 너희끼리 사랑할 수 없다는 거기쯤 아닐까 싶다. 독자가 읽지 않는 곤란을 벗어나려면, 그의 서정은 갱신되어야 한다.

 

(2017.9.14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