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주체 구분하기 – 박준 [지금 우리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2012.12.5)
[지금은 우리가] - 박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났다
“자아를 주체화하고 타인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상처화하는 세 가지 길”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186) 가운데 가장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자아와 주체이다. 시에서 화자가 똑같은 ‘나’일 때, 어떤 것을 자아로 어떤 것을 주체로 읽어야 하는지 난감하기 쉽다. 새로운 것이 예술이고 시라는 조건이라면, 자아와 주체가 ‘서정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갱신하는 기준이라면, 시인은 물론 독자도 자아와 주체를 구분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자아와 주체를 그 자체 정의로 구분하기는 곤란하다. 정신분석학이나 철학 이론을 빌리는 것은 번잡할 뿐 아니라 참고는 되어도 적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시에서 자아와 주체는 같은 ‘나’를 다르게 쓰고 읽어내는 문장의 의미로 보는 게 옳고, 쉽다.
문장의 기본 유형은 아래와 같다. (영어식 기본 문형이지만 한국어 역시 의미구조는 다르지 않다. 아래 이론은 권혁웅 『시론』 29-34 에서 정리한 것이며, 오독은 나의 부실이다.)
A주어 - C서술어 – B목적어/보어
이와 같은 기본 문형에서 ‘자아’의 사고구조는 아래와 같다.
A자아 - C지배형식 - B(=A)대상 (자아의 변체)
반면, 주체의 사고구조는 아래와 같다.
A주체 - C관계형식 - B(≠A)대상 (세계의 실상)
서정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라고 흔히 말해진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고, 자아는 그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A=B)란 자아가 세계를 동일시하는, 말하자면 자아(A)의 세계(B)에 대한 지배형식(C)이다. 반면 자아에서 주체로, ‘서정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사고구조를 바꾸면, A≠B가 된다. 이 말은 자연을 더 이상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며, 세계를 아름다움보다는 ‘상처화’한다는 말이다. ‘나’의 실존에 세계가 정말 아름다울까 생각해보면, 더 많은 순간, 아니 대개의 순간 세계는 고통을 강요하는 게 현실이다. 생명이란 끊임없이 물을 거슬러 헤엄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물을 따라 흘러내리는 순리를 거슬러야 하는 것이 생명 현상이고, 그 역리의 행위는 끝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려는 세계에 대한 시적 갱신이다.
박준의 인용 시 [지금 우리가]에는 주체가 아니라 ‘자아’의 흔적이 강하다.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는 언술은 ‘우리’가 할 말 많고 젊다는 함의이다. 별을 헤는 때가 그 시절이다. 별만큼 할 말 많은 때가 그 시절이다. 그런데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는 말보다 별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라는 언술에는 ‘우리’ 사랑의 비극성이 암시된다. ‘별 맑은 날 너에게 건네는 말’이 사랑의 속삭임이라면, ‘별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이란 사랑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기도(祈禱)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별은 사랑과 소망을 상징하며, 상실의 절망을 암시한다. 여기서 별은 화자 ‘나’가 닿고 싶은 동일시의 대상이며, 이때 ‘나’는 슬픈 ‘자아’이다.
그러고 보면, “자아를 주체화하고 타인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상처화하는 세 가지 길” 가운데 ‘자아를 주체화’하는 길과 ‘세계를 상처화’하는 길은 기실 한 가지 길이다. 자아에서 주체로 시적 화자 ‘나’를 갱신하는 방법이 ‘세계를 상처화’(A≠B)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직 숙제가 남는다. ‘타인을 타자화’하는 그 길 말이다.
(2017.10.1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