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비 맞은 중처럼 슬프다 – 신용목 [인사동]

진후영 2017. 12. 22. 17:56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2017.8.31)

 

[인사동]          - 신용목

 

본 적 없는 긴 뱀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물,

짧게 흰 비늘을 보여주고 꼬리를 끌며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뱀,

수도꼭지를 잡고

나는 인사동 골동품점 앞에서 불상의 잘린 머리를 바라보다 비를 만난 사람 같다

뱀의 목을 틀어쥐고 결심한다,

설거지를 해야지

뱀은 참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뱀이 헤엄치는 물은 결국 구정물이 된다, 너와의 일들처럼

사라진 곳에서 냄새를 풍긴다, 그렇다면 창문을 열고

빨래를 해야지

이것이 지워지는 일이라고 하면 믿을 텐가 뒤엉켜 돌고 있는 색들을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일,

회오리치는 일

 

뱀은 더러워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뱀은 벗은 허물을 다시 입지 않는다

처음엔 불상도 제가 입은 옷을 어떻게든 빨아보려고 비를 맞았겠지, 오늘은 날씨가 좋아

벗을 수 없는 옷과 버릴 수 없는 옷에 대해 생각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

아무리 허물을 벗어도 똑같은 무늬를 가진 뱀과 옷 한벌을 벗느라 목이 잘린 불상이 있다고 ……

 

그리고 무심히 건너편 옥상을 바라보려면,

수도꼭지를 잠가야지

 

19회 백석문학상 심사위원 중에서 안도현 시인은 신용목 시를 가리켜경이로운 조형술로 빚은 시라고 시상(施賞)한다. 그 말은, 조형술이라는 용어를 빌어 신용목 시가 잘 지어진 건물처럼 외관과 기능, 창의와 기술, 상상과 기교를 조화한다는 은유이다. 건축을 예술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일반인의 눈으로도 경이로운 것들은 많다. 신용목 시가 그러한 조형물이라는 뜻을 위 시에서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개수구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투명한 물줄기는 마치 꼬리를 끌며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뱀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첫 번째 상상이다. 불현듯 인사동 골동품점 앞에서 비를 맞으며 불상의 잘린 머리를 바라보던 일을 생각한다. 화자의 두 번째 상상이다. 뱀은 비늘에 많은 색깔을 갖고 있고, 마치 뱀이 그 색깔을 흘리는 것처럼 설거지한 물은 결국 구정물이 된다. 뱀은 더러워지는 근원이 저인 줄 모르고 더러워진 듯이 제 허물을 벗어 버린다. 첫 번째 상상에서 나온 유추이다. 불상은 비를 맞으며 제가 입은 옷을 빨아보려 한다. 더러운 옷은 못 벗고 불상은 목이 잘린다. 두 번째 상상에서 나온 유추이다. ‘벗을 수 없는 옷은 뱀의 허물을 말한다. 뱀의 옷인 허물은 아무리 벗어도 똑같은 무늬를 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원죄이다. 불상의 옷은 목이 떨어져도 '버릴 수 없는 옷'이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곤란)이다. 뱀은 물의 은유이면서 원죄의 상징이다. 불상은 잘린 머리로 곤란의 상징이면서 인생의 환유이다. 두 가지 상상과 두 가지 비유의 복잡한 조합은 신용목 시인이 즐겨 부리는 경이로운 조형술이다.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면, 시인은 그것을 그리움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내 몸의 어떤 성분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102) 인간에게 곤란이 있다면, 시인은 그것을 슬픔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내 몸 어딘가에서 슬픔을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102) 그리움과 슬픔, 그것들로 신용목은 시집 한 권을 조형해 놓았다. 산다는 게 그리움 때문이고, 산다는 게 또 슬픔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런가?

 

 (2017.12.2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