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인가 아닌가 – 진은영, 시인의 사랑
시집 『훔쳐가는 노래』 (창비시선 349, 2015.11.24)
“진은영의 시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견디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으로 위로를 준다.” (김종훈, 『미래의 서정에게』, 60)
시인의 사랑 -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과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잠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2000년 이후의 시들 가운데 변화가 있다는 데 평론가들은 대체로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황현산 선생은 그것을 ‘전통적 서정’과 ‘낯선 서정’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90)으로 구분하고, 김종훈은 ‘전통시’와 ‘실험시’(김종훈, 『미래의 서정에게』, 184), 오형엽은 ‘서정시의 경향’과 ‘전위시의 경향’(오형엽, 『환상과 실재』, 7)이라 호명한다. 명칭이야 무엇이든 그들은 서정과 다른 무엇이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서정의 영역이 다른 무엇으로 다만 넓어진 것이라 여긴다. 누구도 시가 서정인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서정시와 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같은 것이다. 결국, 시를 서정의 영역에서 빼내지 못하고, 서정의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시의 영역을 넓히겠다는 속셈이 시인들에게 있는 셈이다. 진은영(1970-) 시인은 그런 한국 현대시의 개간자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들은 같은 말을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부류들에 틀림없다. 제가 처한 세계가 유별나다고 할 수 없을지라도, 저는 유별나게 세계를 인식하고, 시를 다르게 말하려고 기를 쓴다. 다른 것이 낯선 것이라고 할 때, 낯선 것은 재미없기 쉽다. 재미란 이해되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다. 거친 들판을 개간하는 일이 재미있을 리 없는 것은 시인의 몫이더라도, 그걸 보는 독자 역시 재미없는 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대시는 대체로 어려운데 힘들게 읽을 필요가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황현산 선생은 쉽게 대답한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시를, 그것도 어려운 시를 읽을 필요는 없다.” (황현산, [우리 시대의 멘토] 중앙일보 기사 2017.10.14) 그 말을 뒤집으면, 모든 사람은 아니라도 일부는 시를 읽고, 또한 일부는 어려운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세상사가 이판사판 맨날 그 모양인 것 같아도 그 판을 읽어내는 묘수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시의 효용은, 낯선 시의 효용은 ‘다르게 본다’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가만 생각해 보면, 세상은 다름에서 오는 충격으로 앞으로 밀려나가는 게 아닌가.
위 시는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열한다. ‘너’를 문자 그대로 ‘애인’하고 싶은 누구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읽어도 좋다. ‘너’를 시로 읽어보자.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 등등 그 문장들은 일견 서정적이다. 좁은 서정은 자연을 우월하게 본다. 자연을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성향이 거기 있다.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이라는 소망은 ‘너는 내 애인이 아니다’라는 실상을 역설(逆說)한다. 그리하여 화자인 나는 ‘사과나무꽃, 연한 바람, 민들레 홀씨’를 시로 쓸 수 없다. 나는 너를 위한 시가 아니라, 시로써 나의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는 역설(力說)이다.
그런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잠’ 같은 구절들이 자꾸만 어떤 연상을 이끈다. 끝내 집에 안식하지 못하고 죽은 시인, 빈집을 그 창문을 바라보던 시인, 입 속에 굳은 검은 혀로 할말을 다하지 못하던 시인, 그가 기형도 아니었던가. 위 시는 기형도에 대한 추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같다. 그가 짊어진 슬픔을,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네가 쓰지 않아도’ 내가 써줄 텐데. 그리하여 네가 전위가 되고 나는 서정이 되어 시의 균형을 이룰 텐데. 소망은 실상을 역설한다. 네가 나의 애인이 아니라서, 나는 서정을 말할 수 없다는 시론(詩論)으로 위 시를 읽을 수도 있겠다.
연서인 듯 아닌 듯 하지만, 결론은 같다.
(2018.4.1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