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8

시라는 공룡에게 – 강성은, 동지와 여름일기

진후영 2018. 8. 18. 17:40

시집 『Lo-fi,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 2018.6.29

 

은유를 멀리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사물은 인간과 연결되지 않고, 인간에 동원되지 않고, 사물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수명, 『표면의 시학』, 56)

 

“(모든 시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코드, 새로운 아이콘, 새로운 화법, 새로운 발성, 새로운 성분을 생산한다. 새로운 원동력으로 새로운 꿈을 생산한다.” (이수명, 같은 책, 97)

 

이수명 시인의 근간 시론집에서 인용한 구절들이다. 이 책은 전편 시론집 『횡단』과 거의 같은 구성을 이룬다. 1부를 할애한 그의 시론은, 전편 시론보다 더욱 현대시를, 난해시를 옹호한다. 그의 그러한 옹호는 대략 그것이 새로운모색이고, ‘새로운무엇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술이, 문학이, 시가 특히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는 하등 새롭지 않은, 거의 고집이다. 닮기는 해도 꼭 같지는 않은 게 인간인 것처럼, 예술 또한 닮은 듯 다른 게 아닐까 싶다. 새로움이란 예술이 통과하는 여정에서 스치는 풍광에 가깝고, 목적지는 더 먼 곳에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동지(冬至)          - 강성은

 

누군가 내 얼굴 위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글자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 얼굴은 얼마나 넓은지

글은 얼마나 긴지

나는 앞서간 글자를 잊고

밤새 그의 손길을 따라갔다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사이 누군가 빗자루로 내 잠을 저만치 쓸어놓고

나를 먼 데로 옮겨다 놓고

나는 저만치 쓸려갔다 쓸려오고

그 위로 눈이 쌓였다

그의 밤은 얼마나 긴지

나의 밤은 얼마나 먼지

 

끝없이 계속되었다

                (강성은 두 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 중에서)

 

강성은(1973-)의 시집을 읽는 일은 다른 경험이다. 그 다름은, 우선 밋밋한 언어에서 오고, 또한 꿈으로 그려낸 기억에서 온다. 위 시는, 그의 두 번째 시집에서 고른, 몇 안되는 서정적 어조를 보여주는 한 편이다. 위 시는 비유의 기술이 없다. 은유도 상징도 제유도 환유도, 어떠한 비유도 탈락시킨 느슨한 언어의 짜임이다. 왜 비유를 제거하는가,라는 의심의 한 해제(解題)를 이수명 시인이 알려준다. “은유는 무엇보다 짝을 짓는 것이고, 짝짓기의 수혜자는 명백히 관념 쪽인 까닭이다.” (같은 책, 57) 은유, 넓혀 말하여 비유는 사물(사건)을 드러내기 보다 그것에서 받은 인상 내지 관념에 초점을 두는 방식이다. 사물을, 사건을 홀연히 드러내고 싶다면 비유의 스크린을 제거해야 한다. 해서, 연애를 기억할 때, 얼굴에 손가락 글자의 감각을 비유로 간섭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그 사건은 꿈속에서 증폭된다. 내 얼굴은 얼마나 넓은지 / 글은 얼마나 긴지밤새 그의 손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꿈속에서 더욱 적당하다. 강성은의 시가 꿈을 통하여 기억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꿈을 통해서 시는 기억을 강력하게 발설할 수 있다.

 

강성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골랐다. 그의 언어는 여전히 비유 바깥에 있고, 여전히 그는 꿈을 통하여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여름일기          - 강성은

 

장마가 끝나고 물이 불어난 개울에서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았다 팔뚝만 한 메기를 잡은 아이를 둘러싸고 모두 낄낄거리며 긴 수염을 잡아당겼다 메기는 뻐끔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들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두워질 때까지 아이들이 개울을 떠나지 않았다 물속에 더 많은 것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것을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모여들었다 물속에 아이들이 물고기가 어둠이 물소리가 가득했다 그해에도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있었다 옆집 아이였다

               (강성은 세 번째 시집 『Lo-fi』 중에서)

 

이것은 꿈이다. 오랜 기억이 편집되어, 때로 가위눌리는 꿈이다. 옆집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그해 여름,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는 꿈속에 있다. ‘의 꿈은, 프로이트가 말한 욕망의 대리만족도 아니고 자기합리화도 아니다. 그 꿈은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억하는 것을 강조하는 수단이다.

 

시도 다른 예술 패턴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가 별도로, 혹은 약간의 시차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같은 책, 96) 이수명 시인은 생산과 소비를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경제학의 생산과 소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경제학에서 두 개념들은 주체가 다른 경제현상의 두 측면이지만, 이수명은 다른 차원으로 시를 구분한다. ‘생산하는 시와 소비하는 시라는 말은, 보다 새로운 무엇을 생산하는 시와 그렇게 생산된 새로운 시적인 것을 소비하는 시라는 구분이다. 아쉬운 지점이 여기이다. 그것을 시인이 생산하고 독자가 소비하고라는 것으로 간단하게 개념하는 게 필요하다. 이 말은, 이제 시의 독자론(讀者論)을 연구하자는 권유를 품는다. 혼자 쓰지 말고 같이 읽자는 뜻이다. 재미도 좀 있어야 하지 않나? 현대시는 어떻게 쓸까,만을 고민하는가? 어떻게 읽힐까,를 왜 연구하지 않을까? 그것은 시류에 편승하자는 계산이 아니다. 시는 멸종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2018.8.1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