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9

비눗방울의 높이 – 김영미, 비눗방울

진후영 2019. 10. 31. 16:53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6.20

 

시클롭스키는 대상의 인지와 대상의 발견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은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은 발견되지 않는 수많은 사물들과 행위들로 포화되어 있다. 아침에 이를 닦을 때 우리는 칫솔을 이를 닦기 위한 도구로서만 인지한다. 요컨대 칫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칫솔 자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 일상의 문법이나 일상어의 관습 혹은 자동화된 언어에 종속되어 있는 한, 칫솔은 인지될 수 있지만 발견될 수 없다 (…) ‘낯설게 하기지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예술의 대응이다.

  • 이장욱, 『혁명과 모더니즘』, 160-161

 

1.

김영미 (1975-) 시인의 첫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를 읽으면서, 나는 왜 이 시집을 읽고 있는지, 도대체 왜 이 시집을 구입했는지 한참 흔들렸다. 나는 시집만 읽는다.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소설까지 내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집을 문지시인선과 창비시선 위주로 읽는다. 다른 출판사 시집까지 내가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미의 첫 시집은 아침달 출판이다. 3부로 나뉜 시집에서 2부 마지막 시를 읽기까지 나는 이 시집을 계속 읽어야 할까 갈팡댔다. 2부의 마지막 시는 내가 시집을 구입한 이유, 시집을 읽는 이유를 알아채게 했다. 몇 달 전 그 시를 트위터에 누가 올려 놓았었다. 그 시는 트윗의 140자 제한을 통과할 만큼 짧고, 강력했다. 나는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구매목록에 올렸고, 어느 날 구매했고, 이제 읽는다.

 

비눗방울          - 김영미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에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 나르는 바깥의 시간

 

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인가

 

이 시는 충실한 시적 묘사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 시적 묘사란 언어로써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이다. 모든 그림이 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 듯 모든 시적 묘사가 다 아름다운 시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는 어떤 전형(典型)의 함정을 6줄 붓질로 무색하게 한다. 그림을 느낄 뿐, 이 시의 감상에 따로 해설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부연하자면, 이 시는 은유구조이다. 비눗방울은 바람이고, 방이다. 모서리가 없고, 투명하고, 바람에 실리는 시간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느 눈동자에서 가장 아프게 터질 슬픔이다. ‘가장 아프게 터질비눗방울은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기억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시를 너머, 즉 시집이 품는 대체적 정서 기반이 기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 국한하면, ‘가장 아프게 터질것은 그저 아름다움이라고 읽어도 좋겠다. 시적 묘사는 흔히 그림이고 대개 은유에 의지한다. 그렇게 이 시는 대상 이외를 다 여백으로 생략하는 시적 묘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전형의 함정, 그 현실 제약에 오그라들지 않는 날카로운 스냅에 있다.

 

2.

그 시집에서 두어 편 시가 시적 묘사이고 대부분은 시적 진술이라 할 수 있다. 두 기조는 독해에서 사뭇 다르다. 시적 묘사가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라면, 시적 진술은 거반 모호하다. 시적 묘사가 여백 가운데 농담(濃淡)을 부린 수묵화 같다면, 시적 진술은 구상적 추상이기 쉽다. 시적 묘사가 대상을 뚜렷하게 목표하고 있는 반면, 시적 진술은 대상에 단일하지 않거나 아예 대상을 제외한다. 시적 묘사는 그리하여 통쾌하고, 시적 진술은 모호하여 거북하다. 시적 묘사는 낡은 전형의 약점이 있고, 시적 진술은 못나도 새로움이 있다. 현대시가 독해를 방해하는 시적 진술에 기우는 이유가 거반 새로움 혹은 시적 자유를 향하기 때문일 터이다. 김영미 시집을 읽는 앞부분 시간 동안 내가 갈팡댄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 시적 진술의 시 하나를 덧붙인다.

 

모래내 9         - 김영미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신문에 찍힌 학교의 주소를 본다

모래내 9길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

모래내 그 길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곁을

혹은 내 앞을 지나갔을까

길 위에서 흩어져버린 모래알들

창밖으로 경의선 열차가 지나갔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꼴대처럼

나는 이끼 빛으로 녹슬어

내 기억은 어느 밤 저 열차를 탔던가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

나는 막 출발하려는 기차처럼 기침을 시작했다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

 

화자가 모래내 9길 주소의 어느 장소에 앉아 있다. 그 장소는 학창 시절을 더듬을 수 있는 기억의 장소이다. 시는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처럼 말한다.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는 기억 속 일 것이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는 기억 속 나의 대답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는 현재의 진술이다. 수미상관한 그 언술은 나이를 암만 먹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사(人事)와 만사(萬事)를 한탄한는 기억 속 인사이며, 그 이후 지금까지 만사이다. 지천명은 공자의 허풍이다. 나이를 암만 먹어도 인사와 만사는 어렵다.

 

이 시는 낯설게 읽힌다. 시적 진술이기 때문이며, 몇몇 문장들이 낯설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뜬금없는 차용이 그 하나다. 그것은 바람 부는 현재의 진술일 터이고, 사라진 것에 대한 클리셰이다. 그 문장이 낯선 것은 앞 뒤 문장과 맥락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꼴대처럼은 비유이면서 동시에 풍경의 진술이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과 그 자리에 있는 를 대비한다.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는 가장 낯선 문장이다. 죽음과 즐거움을 대비하는 기이한 비유.

 

낯설게 하기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기법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시인이 낯설게 하기에 새삼스러울 리 없다. 시인은 시적 묘사가 전형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굴레이고, 갑갑하고, 무엇보다 비현실이다. 시적 진술에는 자유가 보인다. 그 자유가 비눗방울만큼 아름답기도 하다면 독자가 불만일 이유가 없다. 거기에 못 미칠 때, 시적 진술은 시적 실패에 가깝다. 시인이 기조가 다른 [비눗방울]을 시집에 묶은 이유가 여기 있을 터이다. 시적 진술로 [비눗방울]만큼 높게 올라가고 싶었을까.

 

(2019.10.3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