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과 성차이 – 고정희 [흩으시든가 괴시든가]와 이덕규[어처구니]
“이덕규의 시를 등단 이전 처음 읽었을 때 만났던 그 남성적 체취를 기억한다. 지금도 우리 시가 지니고 있는 정서와 사유의 여성 편중과 어떤 유약성이 걱정되기도 했던 터라 그러한 그의 시와의 만남이 남달리 든든하고 신선했었다.”
-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뒤표지의 정진규 시인 해설 중에서
남성과 여성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같으면서 다르다는 말은 한 종(種)이지만 차이가 있어 다르다는 사실판단이고, 다르면서 같다는 말은 차이는 있지만 차별하지 않는다는 가치판단이다. 의미의 방점이 다를 뿐, 방향이 반대라도 그 둘은 같은 말이다. 시인 중에서 여류 시인을 따로 꼽는 관행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정서와 사유의 여성 편중과 어떤 유약성’ 같은, ‘현대시가 여성시의 성취에 많이 빚지고 있다’(황현산, 어디선가 읽었는데 인용을 찾지 못함) 같은, 문학성의 성(sexuality)은 엄연하다. 우려와 상찬의 차이가 있거나 말거나, 문학성의 성은 시인과 평자 또 독자 누구도 극복하지 않은 과제일 터이다. 그것이 극복해야 할 과제인지, 혹시 문제제기 자체가 사족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차별은 극복해야 하고, 차이는 그저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원칙이 옳다면, 우려든 상찬이든, 좋게 보면 다 좋은 말이다. ‘여성 편중과 유약성’에 비교하는 것은 시적 남성성을 강조하려는 레토릭일 뿐이고, ‘여성시의 성취’는 성차별을 무력하게 만드는 근거일 뿐이다. 차이는 있다. 차별만 아니라면, 차이는 좋은 것이다.
시의 성은 있다. 시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어쨌든 다르다. 그 차이를, 시의 성욕에서 읽어볼 수 있다면, 조금 쉽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성욕, 그 원초적 욕망을 소재로한 남성시와 여성시 사례를 들어본다. 거기서, 시의 성을 감별할 수 있을까? 성의 시적 성취를 구별할 수 있을까? 비교우위 내지 절대우위를 판결할 수 있을까?
하느님……죄 없는 강물에 불 지르는 저 열사흘 달빛을 거두어들이시든가 어릉어릉 광을 내는 내 눈물샘 단번에 절단내시든가 건너지 못할 강에 다리 하나 걸리게 하ㆍ시ㆍ든ㆍ가
하느님……시월 상달 창틀 밑에 밤마다 우렁차게 자진하는 저 풀벌레 울음을 기어코 흩으시든가 내 간음의 가을을 뒤엎으시든가 짱짱한 아궁이에 장작을 피우시든가
하느님……우리 밥숟가락의 정의에 묻어 있는 독을 닦아주시든가 적멸보궁 진신사리 별밭 속을 운행하는 심판의 불칼을 멈추시든가 능곡지변 갈대밭에 늡늡한 능금나무 향기롭게 하ㆍ시ㆍ든ㆍ가
- 고정희 [흩으시든가 괴시든가], 권혁웅 『시론』, 50, 재인용
고정희(1948-1991) 시인은 1980년대 활발하던 시인이다. 지금과 40여년을 격한 그의 인용시는 어느만큼 시적 원형에 더 기댄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과 인용시의 ‘불사르는 저 열사흘 달빛’은 분명 시적 여성성을 근간으로 한다. 황진이의 시조가 님이 오시면 긴 밤을 나누겠다는 정욕을 노래한 것이나, 고정희의 인용시가 간음을 욕망하는 것이나, 둘은 수동적 능동에서 같다. 시적 원형의 여성성이란 기다리는 것이며, 선택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뜨거워지는 것이다. 인용시의 세 연에서 각각, 화자는 청자인 하느님께 투정한다. 욕망의 상황을 없애주든가 (거두어들이시든가/흩으시던가/닦아주시든가), 상황에 반응하는 나의 욕망 자체를 없애주든가 (절단내시든가/뒤엎으시든가/멈추시든가), 아니면 나의 욕망을 채워주시든가 (하시든가/피우시든가/하시든가), 셋 중에 하나는 해달라는 것이다. 아니, 그중 하나가 아니라 지금 욕망을 채워달라는 불만이다. 교묘한 은유, 가령 ‘죄 없는 강물’은 화자의 심사를 투영한 것이며, ‘열사흘 달빛’은 불륜을 넘보는 남성의 유혹을 은유한다. 그 달빛은 아직 보름에 못 미쳐도 충분히 유혹적이며, 화자는 열나흘 나아가 보름의 달빛은 더욱 견딜 수 없을 터이다. ‘적멸보궁 진신사리 별밭 속’은 여성의 성적 지점의 은일한 은유이며, ‘늡늡한 능금나무’는 금기를 깨는 사과나무의 원형 상징이다. 하필 간음인 것이 더욱 화자를 달구는 욕망인 셈이다.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이덕규 [어처구니].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에서
이덕규(1961-) 시인은 1998년에 등단하여, 2000년 이후 활동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1990년대를 밟고 있으나, 주로 2000년대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소위 ‘미래파’ 등 시류와 무관한 시를 밀고 나온 듯 보인다. 시적 화자가 자아, 즉 시인의 자화상에 가까운 것이나 비유를 많이 활용하는 시적 언술은 아름답지만, 기시감이 없지 않다. 시류 밖에서, 이덕규 시인이 얻은 것은 직관적으로 읽기 쉬운 좋은 시이며, 이름하여 남성성의 굵은 목소리인 셈이다.
인용시는 야하다. ‘노란 마늘 싹’은 ‘숫처녀 성감대’이고,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은 여성의 욕망의 은유이다. ‘손가락’은 발기한 남성이다.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라는 넉살을 읽을 때, 독자는 지긋이 미소 짓기 쉽다. 다 알만하기 때문이다. 인용시에서 남성성은 처음부터 드러난다.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리는 그 행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보는 그 행위, 생각에 앞서는 적극성은 남성의 것이다. 거기 욕망은 있으나, 사랑 운운 감정은 암시조차 없다. 그것은 호기심 이전에 본능이다. 남성성은 손가락이 굽어지지 않을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 행위할 뿐이다.
어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시가 욕망하는 인간을 드러내느라 ‘해학’적인 동시에, 고정희 시인은 거기 ‘연민’을 보태 화자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고, 이덕규 시인은 거기 ‘반성’을 보태 자신을 돌아보려 한다. ‘해학’과 ‘연민’의 조합은 보다 여성적이 되고, ‘해학’과 ‘반성’의 조합은 보다 남성적이 되는 셈이다. 욕망에 대하여, 여성이 생물학적 책임감 때문인지 대체로 방어적이고, 남성이 그 반대로 공격적인 것은 자연스럽다. 욕망의 언어는 남성과 여성에서 다르다. 시를 감추어서 드러내는 언어로 읽을 때, 남성성보다 여성성이 더욱 시적인 것은 그런 성차이가 관여한다고 볼 수 있을까? 황현산 선생이 ‘현대시가 여성시의 성취에 많이 빚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시의 성차이를 말하기보다 시인 가운데 여성이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근황을 말한 것이다. 차이는 있다. 괜히 여성시인이라 구분하는 것은 차별이고, 굳이 시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구분하는 것도 진부하다. 그렇더라도, 시적 성차이는 읽을 때 재미있다.
(2020.8.7 진후영)
[사족] 시의 어조
권혁웅의 『시론』 (문학동네)은 좋은 시론서이다. 그 책에 보면 시의 어조를 ‘화자의 태도’로 정의한다. 권혁웅은 어조를 다섯으로 나누는데, ‘풍자, 예찬, 연민, 반성, 해학’이 그것들이다. 여기에 ‘역설과 반어’를 이중화 장치로 보태, 시는 다섯 어조와 2개 이중화 장치를 조합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시의 어조를 말투가 아니라 ‘화자의 태도’로 보는 권혁웅의 이론은 시를 읽는데 매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