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21

시인의 훈장 – 박은영, 보수동 골목

진후영 2021. 1. 14. 17:21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 시선 259, 2020.7.13

 

  시인의 가난은 어쩌면 훈장이다. 첫 시집에는 대개 시인의 가난의 이력이 있다. 그 가난은 시인의 성장담이고, 가족사이고, 나아가 다중의 사회사를 넌지시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의 시대가 70년대냐, 80년대냐, 90년대냐, 혹은 지금이냐 등에 따라 차이는 있다. 더 멀리 거슬러 갈수록 가난은 무지와 자조의 그늘에 들고, 가까울수록 가난은 억압과 굴레의 어둠에 잠긴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면서 말했다.” (기형도, [위험한 가계ㆍ1969] 중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던 아버지가 역전 다방에서 허리를 꺾은 채 흔들릴 때도 기차는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박은영, [역전] 중에서)

 

  80년대 기형도의 아버지와 가족의 가난은 개인사의 영역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 시절 거반 가난했고, 아버지가 죽어가도 자조 썩인 한숨을 짓는 것 이외 별수 없이 그의 가족은 가난을 감수한다. 지금 박은영의 아버지는 가난에 굴욕을 느낀다. 지는 길이 이기는 길이라던 자기합리화는 지혜가 아니라 반어에 가깝고, 여전히 기차는 역사를 빠져나간다는 그 무심한 풍경에서 시대의, 구조의 몰인정이나 불합리가 읽힌다. 상황이 달라졌고, 시인은 가족과 가난에 대하여 미시에서 거시로 시야를 넓힌 셈이다.

 

  박은영 시인 역시 첫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에서 그런 이력을 드러낸다. 그의 가족과 가난, 현재의 곤궁이 시집 여기저기 산재한다. 또한, 사회 속 일상과 대상들을 통해 마찬가지 곤궁한 삶을 시집에 기재하는 것은, 그의 통과의례가 무지와 자조로부터 멀리 나와있다는 증명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그는 첫 시집에서 제 삶의 이력과 사회의 삶을 함께 기록하여, 그의 시선이 개인사를 뚫고 사회사를 향한다는, 제 속의 가난을 극복할 시적 영역을 넓게 잡고 있다 할 만하다. 그의, 시의 희망이 거기 넓은 데 있을 것도 같다.

 

  시인의 가난은 아무튼 훈장이다. 그걸 제 시집에 우선 걸고, 시인은 그 곤궁에서 시를 출발한다. 거치는 장소마다 그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풍경을, 그 풍경이 품은 속뜻을 찾아낸다. 그는 아래 인용한 시 [보수동 골목] – 부산의 한 명소, 책방 골목길도 들른다. 거기서 생을 책으로, 책을 역사로, 역사를 독자(讀者)로 바꿔 읽어준다. 그 시는 가난한 시인만이 우리에게 달아줄 수 있는 훈장일지 모른다.

 

보수동 골목          - 박은영

 

절판된 책을 읽습니다

읽다가 접어놓은 흔적으로 두툼한 한 권,

로맨스 소설이고 싶었으나

그의 생은 고딕체

딱딱한 문장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최초의 독자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죠

한 단락 안에서 줄거리 없이 살다

장문의 봄,

별이 되어 각주로 매달렸다죠

겉장의 시대를 지우고 수명을 다한 날들이

좁은 장지에 몸을 뉩니다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바닥에 깔린 역사서

구겨진 가슴이 기운 세계를 받치고 있습니다

부록 같은 자식들은 곁을 떠나고 없지만

책장 어디쯤 민들레 한 송이 피어 있을,

저 두꺼운 몸을 빼내면

지구 한 귀퉁이가 무너져 버릴지도

양장의 날개를 펼친 책들이 페이지를 벗어나

어느 문명의 별을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어깨 접힌 골목에 밑줄을 긋는

저녁의 행간

늙은 개척자의 목차에서 길을 찾던 바람이

한 장, 보수동을 넘깁니다

 

(2021.1.14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