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21

힘도 없는 힘으로 힘이 세다 – 김신용, 콩나물에 대한 헌사

진후영 2021. 3. 12. 13:43

시집 『비는 사람의 몸속에서도 내려』, 걷는사람 시인선 9, 2019.6.13

 

  “김신용의 시는 선전ㆍ선동적인 성격을 표출하지 않으며, 1980년대 노동시의 전형적인 어법에 침윤된 흔적 또한 상대적으로 적다. 월급통장이나, 노조 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김신용은 당대의 노동자 시인들 중에서도 최저의 생계조건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몸과 삶과 시가 남김없이 일치하는 준엄한 삶의 시간을 살아냈다. 시의 텍스트에 한정해볼 때도, 김신용의 시는 동시대의 노동시들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성취한 예로 부족함이 없다.”

-    김수이,『서정은 진화한다』, 265

 

  살면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공부하고 싶은데 옆에서 자꾸 거스르는 일은 흔하다. 일에 복잡한데 집안에 우환이 겹친다. 성장한 자식은 밉상이고 노쇠한 부모는 진상이다. 십년 더 책을 읽어야 하는데, 마누라 성화에 세상으로 밀려 나서는 허생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전지적 작가 덕분에 전능하게 인생을 살았다. 현실은 자꾸만 꿈을, 소망을 접으라고 끌어내린다. 그걸 끝까지 부여잡는 게 의지일까 우둔일까,조차 확신할 수 없다. 결국, 무엇으로 버텨야 하나? 버티는 것이 옳기는 한가?

 

  취미와 직업, 꿈과 현실이 일치하기를 보통 바란다. 예술을 하는 꿈과 현실을 살아내는 희망이 다른 것을 고민한다. 현대인은 취미와 직업이 다르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도 있다. 취미와 직업은 그 간격이 멀수록 적응이 어려운 곤란이 있다. 책 읽고 글 쓰는 취미를 가진 이가 막노동을 해야 할 때, 그가 느끼는 현실은 고단함을 넘는 절망 내지 분노에 가까울 수 있다. 취미와 직업이 가까울 때, 그것은 정말 복 같다. 취미와 직업을 가까이 둘 수 있는 환경을 가졌거나, 취미 옆에 직업을 두고 버티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거나, 취미와 직업이 가까운 것은 인생을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불행한 행복 내지 행복한 불행이다. 행복과 불행이 겹치는 아이러니 취미와 꿈, 직업과 현실은 그 간격의 차이를 좁히려 하기보다 그 차이의 포용에 오히려 해법이 있는 것 같다.

 

  김신용(1945-) 시인은 그 간격이 극히 멀었던 사례이다. 노동도 일용으로 전전했던 것 같고, 노조의 대척이랄 수 있는 용역이 되어 가난한 자를 밀어내는 철거까지 했다고 한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폭력하는 그 경험은 처연하다. 그것은 자해이다. 그가 제 삶을 자해하는 지경까지 몰린 것은 삶의 강제이다. 그가 제 문학을 일군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제 삶에 강제된 타율을 제 문학에 자양으로 삼은 것은 오로지 그의 의지일 터이다. 그가 이룬 것은 내가 못 이룬 것의 반면(反面)이다. 취미와 직업, 꿈과 현실의 거리가 장애의 근본은 사실 아니다. 문학과 삶은 한 덩어리이다. 그것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둘의 거리를 불만하는 것은 아둔함 아니면 합리화이다. 그런 미망을 벗어날 때, 어떤 개안이 있을지 모른다.

 

  이제 처연하던 노동으로부터 좀 비켜났는지, 시인은 자신의 개안을 새 시집에 소개한다. 그중 내가 꼽은 최선이 이와 같다.

 

콩나물에 대한 헌사          - 김신용

-    적滴 25

 

  콩나물은 힘이 세다 시금치를 먹는 팔뚝처럼 힘이 세다 물만 먹어도 독한 알코올을 해독하는 물질을 가진다 발갛게 고춧가루를 풀면 숙취의 얼큰한 해장국이 되어준다 처마 끝에 맺힌 물방울처럼 곧 떨어질 듯 연약해 보여도, 창문 하나 없는 독방에 갇혀서 햇살의 비밀문서를 읽을 줄도 안다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 찾아온 연서戀書이듯, 바람의 냄새를 맡을 줄 안다 뿌리는 흙 한 줌 보지 못해도, 잎을 향해 발뒤꿈치 한번 세우지 않는다 바람을 향해 곁눈질하는 수염 난 뿌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줄 안다 이 없는 잇몸도 씹을 수 있도록 물만으로, 오직 물만으로 희고 부드러운 섬유질을 만든다 마치 연목구어처럼, 그 나무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구한 것처럼 몸의 탄성을 기른다 그런 콩나물은, 정말 힘이 세다 오직 물만으로 몸속의 뼈를 만들지만, 그 물의 뼈로 인생을 세운다 그런 자신을 누가 콩나물 대가리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모두冒頭는 뿔 한번 세우지 않는다 그 물의 뼈로 웃어준다 소금 한숟갈과 만나도 간단히 국이 되어주면서, 바보처럼 웃음만 짓는다 이가 없어도 씹을 것이 없는 입을 위해, 그렇게 쉽게 반찬이 되어준다 콩나물은 힘이 세다 아무런 힘도 없는 힘으로, 힘이 세다

 

  김신용 시인의 이번 시집 『비는 사람의 몸속에서도 내려』는 물방울 연작이다. (, 물방울) 1에서 43까지 부제가 붙어 있고, 시집은 물방울 이미지를 모티프로 끌어간다. 시마다 단일한 모티프를 담는 일은 대가의 집념 같지만, 시집 전체가 그렇게 시적인 성과를 높였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느슨한 설명과 자의적 해석은 자주 시선을 거스른다. 인용한 시는 그것들을 벗어나는 수작이다. 대가가 무심한듯 붓질하다가 어느 날 하루 세필을 든 것 같다. 그 언어의 붓질이 정교하다.

 

  위 시의 어조는 아이러니이다. 역설이 의미를 대조하는 트릭을 외장하여 자주 급외라면, 아이러니는 역설을 내장하여 대개 급등한다. 콩나물이 힘이 센 것은 아이러니이다. 콩나물이 시금치이고 해장국인 것이나 콩나물 시루가 창문 하나 없는 독방인 것은 은유 개념이고, 햇살의 비밀문서이며 바람의 냄새이고 고양이 목에 방울이라는 것은 환유 개념이다. 그 은유는 콩나물의 효용을 확인해주고, 그 환유는 삶의 곤란을 지혜로 전위(傳位)한다. 콩나물은 힘이 세다는 시의 전언은 약해서 강하다는 역설을 내장하는 아이러니이다. 물의 뼈로 인생을 세운다아이러니가 이 시를 빛나게 하는 발상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런 힘도 없는 힘으로, 힘이 세다는 역설은 차라리 없어도 좋았을 사족 같다.

 

(2021.3.1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