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22

축구보다 야구보다 시가 기쁠 때 - 채길우, 하품

진후영 2022. 4. 11. 08:47

  채길우(1982-) 시인은 2013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지 거의 십년, 첫 시집 [매듭법] (문학동네시인선 137, 2020) 출간이 늦어 이제 40세라도 신진인 듯하다. 그의 시를 알지 못하다가 이번 계간 창비에서 2편의 신작 시를 읽게 되었다. 창비 신작 시 섹터는 기성에서 신인까지, 서정에서 실험까지, 시인마다 차별 없이 딱 2편씩 시를 게재한다. 거기서 눈에 띄는 시를 만나는 것은 도심의 쪼그라든 산림 속에서 딱다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를 듣는 일만큼 드물다. 채길우의 그 2편은 단박에 눈에 읽히는, 기쁜 서정시이다.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은유적 묘사로 기술하는 언어의 마법이 그 2편에 있다.

 

  시인이 시 쓰는 재능을 가졌다는 증거를 보는 일은 기쁘다. 류현진이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는 뉴스처럼, 손흥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만들었다는 뉴스처럼, 시인이 직관적으로 읽히면서 아름다운 시를 써냈다는 기록을 볼 때 또한 기쁘다. 축구선수처럼 야구선수처럼 천문학적 보상은 꿈꿀 수 없더라도, 나는 그들 뉴스를 보면서 미소 짓는 것보다 더 깊고 긴 미소를 그 2편 시에 보낸다.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첫 시집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그가 얻을 보상은 하찮겠지만, 그가 알지 못할 기쁜 마음을 여기 기록한다.

 

  아래 인용한 시 [하품]은 창비 계간지에 실린 2편 중 하나이다. 또 한편 [태아처럼] 역시 단박에 눈길을 끌 만큼 읽어서 기쁘지만, [하품]이 훨씬 기교가 두텁고 감각적이라 생각한다. [하품]은 어린아이가 하품하다 잠들고 꿈꾸기까지 짧은 과정을 필름식 사진을 찍고 현상과 인화하는 과정에 착상하는 은유구조이다. 하품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눈물도 찔끔 흘리는 찰나적 행위는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일에 빗대는 은유가 된다. 또한 하품에서 잠들고 꿈꾸는 전 과정은 사진을 찍고 인화하기까지 여러 세밀한 기술을 거치는 은유구조가 된다. 시에서 A=B라는 기본 은유와 동시에 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은유구조로 엮어내는 일은 드물지 않은 기교이다. 그것들에 시적 성공을 만드는 일은 메이저 리그에서 1승만큼 프리미어 리그에서 해트트릭만큼 감탄할 일은 안 될까. 비록 그것들에 비교가 안 되게 급부는커녕 박수조차 없더라도, 여기 누군가는 그것들을 더욱 기쁘게 읽는다. 그것들보다 더욱 화려하다. 시여, 시인이여.

 

하품          - 채길우

 

졸린 아이는

카메라의 조리개를 점점 넓히다가

찰칵, 셔터를 누른다.

그러곤 흘러나온 현상액

한방울을 무심히 닦아낸다.

 

초점 맞지 않은

밝고 묽고 나른하게

흐릿한 순간으로부터

아이는 낮잠에 든다.

 

너는 무엇을 본 거니?

어떤 사진을 찍을래?

용액 속에 담긴 꿈을

일찍 흔들어 깨운다면

무슨 메마른 생각과 궁금하리만치

이루지 못한 습작들이 인화될까

 

활짝, 때론 궁색하거나 새침할 만큼

어떻게 문을 닫고 어느 창을 열어야 하는지

얼마나 빠르게 다만 너무 조급하지 않도록

기다림과 망설임과 유혹과 후회의 전부, 혹은

어색한 흑백 미소와 총천연색의 환한 떨림 사이

 

기껏해야 얇고

새까만 막일 뿐인 한 시절 위로

크게 벌린 기지개이거나

수줍게 오므린 입술로서 다가가

 

잠시 숨을 불어넣고 들이쉬며 빛 가린 채

입김 스민 자국 속에 미온한 손을 넣어 끼적여본

그림과 글자와 색깔이 미처 지워지지 않은 동안의

눈부신 투명에 더 가까운 어둠에서조차

 

아이가 비로서 눈을 뜨고 일어나

스스로의 그림자를 선택해 당연하고

평순하지만 유일한 계조와 명암으로

사로잡힌 비밀과 영원을 장착할 수 있도록

이 세상 그 모든 노출과 그늘 아래서

이 맑고 많은 광원들 안에서

 

이 전부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게 오직 진짜는 아니더라도

 

-    [창작과비평2022]호에서

 

(2022.4.10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