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빚 아니 빛 – 박노해, 세 가지 선물
“박노해는 ‘혁명적’ 시인이었다 (…) 그는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힌 노동자 주체들을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박노해는 이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노동자 주체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가를 ‘계몽’하고자 하였다.”
- 이철송, 『황지우와 박노해, 증상과 욕망의 시학』, P37
여기서 ‘타자의 욕망’이란 자본주의에 포섭된, 압제가 강제하는 욕망을 말한다. ‘자기 욕망’이란 자본과 압제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반성하는 가운데 터득하는 성찰적 욕망을 말한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끝부분
노동자가 저항해야 하는 것은 자본의 횡포만이 아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지 않는 자기 극복이 필요하다. 맞벌이 부부 – 돈은 맞벌어도 가사는 아내 몫으로 떠넘기고 있는 자신을 남편 – 시적 화자는 반성한다. 노동 운동을 하면서, 세상의 불평등에 저항하면서, 부부간 불평등을 외면하고 있다는, 아픈 자각을 통하여 시적 화자는 비로소 주체로서 ‘자기 욕망’을 시작한다.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은 ‘계몽’이다. 그 시적 성취는 차치하고, 박노해는 저항하며 반성하는 주체를 그려낸다. 반성을 통하여, 시적 주체는 ‘욕망의 변증법’ - 현상의 부정과 자기 부정의 단계를 밟으며 새로운 주체, 인간상을 세우려 한다. 그때 ‘계몽’은 올곧은 계몽이다.
한참 세월이 흘러서, 박노해는 노동과 투쟁으로부터 전향(?)한다. 그가 전향하여 간 곳은 의외로 자족(自足)의 세계이다. 투사(鬪士)가 도인(道人)이 될 수도 있다. 젊은 시절 낭자한 피를 회한하며 강변에 낚시 드리우고 세월을 흘리는 일도 할 수 있다. ‘자기 욕망’을 설득하다가 ‘자기 성찰’로 시대를 관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계몽’으로부터는 왜 전향하지 않을까? 그의 근작 시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여기쯤이다.
세 가지 선물 – 박노해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은
단 세 가지
풀무로 달궈 만든 단순한 호미 하나
두 발에 꼭 맞는 단단한 신발 하나
편안하고 오래된 단아한 의자 하나
나는 그 호미로 내가 먹을 걸 일구리라
그 신발을 신고 발목이 시리도록 길들 걷고
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저녁노을을 보고
때로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담소하며
더 많은 시간을 침묵으로 미소 지으리라
그리하여 상처 많은 내 인생에
단 한 마디를 선물하리니
이만하면 넉넉하다
한 친구가 SNS에 박노해 인용시를 포스팅했다. 그가 전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근작 시를 확인하려니 화가 치밀었다. 나의 화는 친구가 귀촌한 후 비 오는 날마다 화롯불 피고 파전 굽고 막걸리 마시며 ‘이만하면 족하다’ 메시지 날리는 꼴이 배 아픈 탓도 있다. 이만하면 족한 인생, 니나 많이 누리라 하려다가 시 같은 문장으로 댓글을 달았다.
복과 빚 – 진후영
그리 할 수 있으면 복되다
그리 할 수 없어도 복되다
관계 중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서 그리할 수 있고
그게 가능한 인생이면 복되다
그게 안되면 책임 다 끌어안고 제 인생 소모하므로 벅차더라도
한 인생 얽혀 사는 거 또한 복되다
사는 거 그냥 살아있다는 그것만으로 복되다
라고 하지 말자
사는 거 살아 있는 거
그거 복된 거라도 그 복의 빚을 갚으라
그리 할 수 있어도 복되게
그리 할 수 없어도 복되게
제 몫에 남의 몫을 얹더라도 복되게
제 몫에 제 몫을 빼더라고 복되게
그 복의 빚을 계속 갚으라
세상에 하고 많은 인간들이 있다. 인간사가 있다. 각자가 돌보아야 하는 일이 각자의 일뿐이라면 좋겠다. 여전히 가난하게 혹은 풍족하게 살고, 젊어도 늙어도 떠안은 일은 있다. 각자 눈 감고 귀 막고 코 풀고 살면서 ‘이만하면 족하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을 번민하지 못하더라도 한생을 고민하는 일은 있다. 각자 욕심을 다스려 분에 넘친다고 자족했으면 좋겠다.
좋겠다! 좋기도 하겠다! 다 떠내려가도 강물을 거스르는 오직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물고기라는 생명현상! 살아있다는 그 빚, 아니 빛!
(2022.5.1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