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현실의 간격 2 – 이정훈, 용치는 남자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시선 444, 2020.3.6
용치는 남자 - 이정훈
꼬리 밑을 만지면 심장이 푸르르 요동치고
잔뜩 굳어 있던 비늘이 흘러내린다
펜치와 드라이버가 그의 손
기름때 묻은 몇가닥 전선에
용들은 퉁방울눈을 내리깔고
진흙 묻은 발바닥도 조심스러워진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배 속의 돌을 꺼내려
밑을 활짝 벌리고 주저앉은 꼴이란 손가락 하나로
날아가게도 영원히 눈 뜨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면
커다란 덩치란 별게 아니지
그는 정원에 떨어진 수염 조각을 쓸어 담고
연못에서 비늘 조각을 주워낸다
개복숭아나무 그늘에 졸던 용이 비닐호스 물줄기에 놀라
덜 익은 복숭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온몸 가득 불을 밝힌 용들이
떼 지어 그의 동굴집 앞을 지나간다
거대한 공장의 활화산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석회석을 삼킨 뱃구레들이
털렁털렁 불과 연기를 흘리며
어딘가의 빈 분화구를 찾아간다
그는 동굴 문을 여미며 언덕을 쳐다본다
아침이면 밤새 날다 지친 용들이
또 정원에 와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인용시는 은유 구조이다. 트럭은 용이고, 트럭 수리점(인용시는 박달재 ‘안전밧데리’ 주인에게 헌사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은 무릉도원처럼 보인다. 현실이 신화로 은유되는 셈이다. ‘복숭아 꽃이 피는 마을’, 무릉도원(武陵桃源)에는 삼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한 알 먹으면 천 년을 살 수 있는 복숭아가 열려야 한다. 개복숭아는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과일을 얻지 못하고 그늘에서 용들이 쉬고 있다. 용들은 이상향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용이기는 한 것일까? ‘밤새 날다 지친 용들’이란 빨리 달렸다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용들은 ‘배 속의 돌’을 담고 있으니 날지 못하고, 개복숭아 그늘에서 쉬고 있으니 천 년을 살지 못한다. 그들을 용이라 부르는 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욕망일 뿐이다. 허망한 신화.
현실은 욕망의 세계이다. 욕망의 극단이 신화에 닿을 수 있겠지만, 신화와 현실의 간극에 아득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현실의 사이를 용이라 불리는 트럭 모는 사내가 왕래하고 있다. 그가 현실의 트럭을 몰고 신화 속 쏘가리와 호랑이 혹은 용이 되려 하고 있다. 그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쏘가리도 호랑이도 하물며 용도 아닐 것이다. 현실을 버티는 그는 트럭 기사이다. 쏘가리도 호랑이도 하물며 용이 되기도 한다. 신화를 꿈꾸는 그는 시인이다.
(2023.1.2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