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23

사물시를 넘어서는 사물시 – 송승환, 성냥

진후영 2023. 6. 11. 09:24

시집 『드라이아이스』, 문학동네 2007.12.17

 

애비는 종이었다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자화상]에서)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황지우, [沿革]에서)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기형도, [위험한 家系ㆍ1969]에서)

샤프심을 훔쳤었나 보다. 엄마는 문방구가 가장 붐빌 등교 시간에 내 손을 잡고 그곳으로 이끌었다우리 애가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 (최재원, [자수]에서)

 

  시인의 첫 시집에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성장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통과의례라고 하는 것은 그 성장담이 대개 가난이나 곤혹의 기록이고, 시인으로서 어떤 식이로든 넘어서야 할 상흔이기 때문이겠다. 기억을 반추하는 일은 사실을 재생하는 일이 아니다. 기억이란 사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상의 집합이다. 따라서 기억한다는 그 자체는 이미 기억의 극복이라는 욕망이 반영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사실대로 기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기억하는 일이란 현재 욕망하는 무엇을 찾아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기억하는 일의 효용일 터이다. 그렇게 첫 시집에서 성장담은 과거에 대한 오늘의 욕망을 찾는 일이 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 제 성장담을 기록하므로 하여, 제 삶의 현재를 욕망하고 제 시의 출발을 현시한다고 할 수 있다.

 

  첫 시집에서 그런 통과의례를 건너뛰는 시인이 있다. 성장담 말고도 시가 품을 것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 의식을 무시하는 시적 기획을 보여주는 첫 시집이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송승환(1971-) 시인의 첫 시집이 그와 같다. 2003년 등단하여 2007년 첫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첫 시집으로써 이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지연이, 아마도 학문적 성취의 비용이라고 한다면, 감수할 만한 일이겠다 싶다. 송승환이라는 이름을 연구공간 [수유너머] 관련 책 -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에서 먼저 보았다. 최진석, 이진경, 송승환 등이 공동 저자이며 모두 [수유너머] 연구자들이다.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그러한 연구공간이 있고, 그들 성과를 책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은 독자의 수혜이다. 그들 학문적 수준이 어디에 도달했는지, 그 경지를 송승환의 첫 시집으로 엿볼 수 있다고 말해도 전혀 헛짚는 것은 아닐 터이다.

 

성냥          - 송승환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무리를 잃고 부리도 발톱도 둥근 머리 속에 파묻은 붉은 새 한 마리 어두워지는 저녁을 응시한다

  일어나는 불꽃 타오르는 불길 검게 타들어가는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간다 바닥에 떨어지는 재

 

  인큐베이터 갓난아이가 가파른 숨을 쉬고 있다

 

  송승환 시인의 첫 시집은 얄팍하다. “대개 시인들은 60100쪽 분량을 기준으로 시집을 구상하는 것 같다. 이 시집은 45편의 시에 본문 47쪽으로 되어 있다.” (김종훈 평론집, 『미래의 서정에게』, P308) 그만큼압축과 절약의 시들을 엮어낸 시집이다. 대부분의 시가 사물의 이름을 시제로 내세운 것으로 이미 사물시를 예감하게 한다. 그 시집은 통상적 시집을 읽는 시간을 절약하게 하고, 시를 읽는 오래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 시집은 오늘날 시에 기대할 수 있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한국시사에 사물시를 시도한 시인들이 여럿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그러했고, 오규원의 날이미지시가 그런 사례들이다. 그들이 도달한 경지가 있지만, 그들이 무의미시에서 날이미지시에서 사물을 사물로써만 형상했다고 평가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한 순수시가 편향된 시각인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세계에 대한, 세계의 실상에 대한 실패를 그들은 이미 자기 이론에 내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물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인간에게 이상향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허망이랄까. 송승환 첫 시집은 사물시 같으면서 그 사물은 세계와 관계하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사물시의 개척이며, 유비를 통하여 시적 비유를 통합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개척이라고 본다. 개척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시의 시야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시를 연구한 학문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인용시 [성냥]에서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새는 성냥의 은유이다. 붉은 새 한 마리, 즉 성냥에 붙은 불꽃이 어두워지는 저녁을 응시하는 거기 그때 사물과 세계는 상호교감하는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 성냥은 어두워지는 세계를 잠시라도 밝히는 존재 혹은 몸짓이다. 결국 바닥에 떨어지는 재가 되더라도 성냥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인큐베이터 간난아이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환유이다. 간난아이가 인큐베이터에서 가파른 숨을 쉬는 그걸 희망으로 읽기는 어렵다. 가파른 숨을 쉬는 그 사태는 위태롭기 때문이다. 성냥과 간난아기는 유비이다.

 

  유비란 세상의 모든 것을 동일한 지평에 놓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은유가 부분적이라면 유비는 전체적이며 은유가 단편적이라면 유비는 체계적이다. 유비가 은유와 제유, 환유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유비에는 체계성과 비교 가능성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    권혁웅, 『시론』, P199-200

 

  대상 혹은 사물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서정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시의 한쪽은 그렇게 세계를 해석하는 시도를 한다. 어쩌면 세계를 해석하지 않는 사물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세계의 실상과 관계 맺는 사물시는 다른 시도가 되는 것이지 싶다. 송승환의 첫 시집은 사물시로써 사물시 같지 않게 세계의 실상을 유비한다. 얇팍하지만, 거기 한참 읽을 만한 시들이 가득하다.

 

(2023.6.10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