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시와 서술시의 간격 – 이범근, 간
시집, 『반을 지운다』, 파란시선 0013, 2017.7.29
“여기서 서술은 (…) 삶의 파편들을 집합시킴으로써 사실과 사건을 차례로 배열한다는 서술 고유의 사전적 의미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서술이다.”
- 김준오, [서술시의 서사학], 『문학사와 장르』, P83
인용한 김준오 선생의 책에서 나는 서술시의 난해와 요해의 단서를 찾았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1930년대 이전 ‘서사시를 비롯한 과거 서술시’에는 ‘이야기의 도입’에 치중하는 ‘대중성의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대중성, 즉 이해가 쉬운 서술시의 전통은 묘사시의 ‘이미지와 은유에 현대성을 부여한 30년대 모더니즘 시 운동’을 통하여 전복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최근 현대시에서 서술시가 전통의 리얼리즘에서 반리얼리즘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징후’라고 선생은 진단한다. 한국 현대시는 서술시에서 묘사시로 다시 서술시로 추세를 전환하면서 요해에서 난해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묘사시와 서술시는, 이미지와 비유(선생은 은유라고 했지만, 은유와 환유를 포괄하는 비유가 더 적합할 것 같다) 등과 같은 언술 형식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시의 구심력에 차이가 있지 싶다. 묘사시는 대상이 중심을 향하고, 서술시는 화자의 의도가 중심을 향한다.
압정 - 송승환
비에 젖은 나무가 녹슬어간다 창공을 가르고 날아온 햇볕이 저물녘까지 내려친다 뿌리까지 누른다 둥글고 납작한 단 하나의 은빛 이파리에서 물이 떨어진다 물방울 꽂힌 자리마다 깊게 파인 보도블록 사이로 줄기가 박힌다 꽃은 피지 않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잎이 툭 끊어진다
산에서 가져온 묘목 도로변에 심어졌다
- 시집 『드라이아이스』에서
현대 묘사시와 서술시의 간격이 먼 것 같아도, 실제 그런 성향의 시집을 읽다 보면 그 간격이 생각보다 밭은 것을 본다. 묘사시를 꼽으라면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오규원의 날이미지시가 떠오를 수 있겠지만, 시를 이미지 자체로 더 나아가 시에 물성까지 부여하겠다는 과격한(?) 시도를 제외하고 보면, 송승환, 유홍준, 이덕규를 나는 묘사시를 잘 쓰는 시인으로 기억한다. 그들 묘사시의 중심에는 대상이 자리잡고 있다.
인용한 송승환의 [압정]은 압정과 묘목이 유비 관계이다. 첫 연에서 압정은 묘목으로 은유된다. 나무가 녹슬어간다는 문장은 나무가 압정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둥글고 납작한 단 하나의 은빛 이파리’ - 압정의 대가리는 결국 녹슬어 끊어진다. 둘째 연은 도로변에 심어진 묘목을 한 줄로 기록한다. 그 묘목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첫 연에서 나무가 압정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무는 압정으로, 생명은 위태로움으로, 나무가 비유였다가 압정이 비유로 바뀌는 역전이 일어나는 셈이다. 그렇게 대상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이 시의 중심은 대상이다.
경운기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 이덕규
고집이 센 경운기를 샀다
입을 꽈 다물고 잔뜩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엉덩이를 걷어차고 코를 움켜쥐고
몇 날 며칠 씨름을 하다가 드디어
경운기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민다
간다, 까만 연기를 퐁퐁 날리며
아버지가 달려간다
앞만 보고 달려간다
뒤뚱거리며 개골창을 건너
언덕을 뭉개듯 헛바퀴를 돌려
산비알을 오르고
동네를 돌아 들판을 향해
노을 속으로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아버지
브레이크가 없는 아버지
달리면서 기름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콧노래를 부르는
저기 아직도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부르르 떨며 달려가는
오, 석유냄새 나는 나의 아버지
-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보았다』에서
이덕규의 인용시에서 경운기는 아버지를 환유한다. 경운기는 아버지가 부리는 농기계가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로 묘사된다. 이 시 역시 대상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묘사시의 중심에는 대상이 자리잡고 있다. 대상으로 말하기. 묘사시가 직관적으로 더 이해가 쉬운 것은 대상이라는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서술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대상이 아니다. 거기 대상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여럿이라서 중심이 되지 않는다. “서술은 시간적 질서도, 인과성의 질서도 해체”(같은 책, P83)하여 직관적 이해를 방해한다. 대상이라는 중심 대신 서술시에 있는 것은 감각 또는 의도이다. 대상이 중심을 잡는 대신 산개하는 서술들이 일제히 가리키는 그것이 중심이고, 그것을 읽어내는 게 서술시를 요해하는 요령이다.
묘사사와 서술시를 구분하는 이론에 따르면, 그 둘은 상호 극복이거나 배척처럼 보인다. 그 둘을 읽다보니까, 그 둘이 서사를 품은 경우를 자주 보게 되고, 그때 묘사와 서술은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인다. 그 둘이 어찌되었든 중심을 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상으로 다른 하나는 의도로. 근래 읽은 이범근(1986-)을 나는 서술시를 잘 쓰는 시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간 - 이범근
수액걸이에 링거를 거는
흙빛의 얼굴
만삭의 남자가 화장실에 있다
고로쇠나무에 꽂힌 호스처럼
흐릿한 요도
강변의 넝쿨을 적시지 않는 물줄기가
하류로 흐른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졌다
마르면 갈라지고
비에 젖는 동안 흩어질 것이다
몸을 탈출하지 못한 열기가
가뭄의 내부를 단단하게 굽는다
굴뚝 없는 덩어리
그을음이 몰려온 얼굴
밤은 어깨 위에 얹혀 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듯
몸을 친친 감은 호스를 걷어 내며
돌아눕는 밤
꿈뻑꿈뻑 떴다 감는 밤
발길질 없는 만삭의 배에 실핏줄이 돋는다
간경화을 앓다가 간암으로 운명을 달리한 사내를 보았다. 그는 인용시처럼 “흙빛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용시 [간]은 그와 같이 흙빛의 얼굴을 한 사람, 짐작하건대, 시인의 근친에 관한 서술시이다. 어렵지 않게 시가 서술하고자 하는 환자의 상태, 그 절망적 감각을 읽어낼 수 있다. [간]은 앞서 인용한 두 시와 다르다. 묘사시로써 앞의 두 시는 각각 압정과 경운기가 묘목과 아버지를 대리한다. 서술시로써 [간]은 흙빛, 물줄기, 열기, 밤, 만삭, 등등 여러 서술들이 있을 뿐 중심을 차지하는 이미지는 없다. 그러나, 산개하는 서술들이 일제히 가리키는 무엇이 있다. 그것, 그 감각, 그 의도가 서술시의 중심이다.
이범근의 서술시는 묘사시와 ‘반서술의 서술시’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할 것 같다. 그를 읽는 것은 묘사시와 서술시의 간격을 체험하고 ‘반서술의 서술시’는 더 멀겠다고 짐작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 간격들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 나의 소득이고, 소견이다.
(2023.12.2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