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시 참여시 그리고 일상시 – 권상진, 나무의자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시인선 87, 2023.4.13
1.
“이제 문학은 기성 사회에 대한 혁명적 저항을 반복하는 대항의 문학 또는 ‘미래’의 문학, 그리고 마침내 고독에 대해 점증하는 자만심을 가지는 은자의 문학이 된다.”
- 후고 프리드리히 저/장희창 역, 『현대시의 구조』, P44-45
국내에서 1960년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시를 순수시와 참여시로 구분하던 경향은 매우 지엽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 시절 국내가 정치적으로 독재 체제였고, 경제적으로 재벌기업을 대놓고 밀어주던 개발 체제였던 현실과 관련이 있다. 그렇게 당면한 현실 권력에 직접 저항하는 부류를 참여시, 그에 거리를 두고 시의 본연을 구축하려는 부류를 순수시로 구분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냐 참여냐,라는 역사적 잔여는 살아남아서, 전위냐 전통이냐 난해냐 요해냐 같은 2분법적 논쟁 내지 구분이 아주 위력을 잃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런 2분법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못한 편이다.
인용한 책 『현대시의 구조』는 독특하다. 명제와 사례로써 논증하는 통상의 시론(詩論)이라기보다 저자가 통찰하는 현대시의 현대성에 대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책은 현대시의 현대성을 ‘불협화와 비규범성’이라고 정의하는데, 그 가운데 ‘비규범성’에 대한 저자의 설명 중 하나가 인용한 문장이다. 그 문장에 들어 있는 ‘기성 사회에 대한 혁명적 저항’이란 지난 시절 국내의 참여시를 한정하는 수사(修辭)에 비견되고, 그 문장 전체는 마치 참여시의 강령처럼 착각되기도 한다. 정작 저자는 현대시의 그러한 현대성을 ‘순수시’로 이름한다. 순수시가 바로 ‘기성 사회에 대한 혁명적 저항’의 기치를 걸었다는 아득한 사실을 생각하면, 국내에서 참여냐 순수냐,라는 구분은 기형적이라 느껴진다. 현실 정치(치안)보다 기성 사회(규범)가 훨씬 거대한 장벽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규범성’를 지향하는 서구의 순수시는 난해한 언어로 오리무중해도 ‘참여’의 형식에 다름 아니다.
2.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 주디스 버틀러 저/조현준 역, 『젠더 트러블』, P13
순수시라는 현상이 있다. 서구는 보들레르(1821-1867), 랭보(1854-1891), 말라르메(1842-1898) 등 19세기 프랑스 시인들을 현대 순수시를 시작한 위인들로 삼고 있고, 그 의미야 다르지만 국내는 1930년대 누구를 꼽거나 1960년대 시와 시론을 겸비한 누구를 꼽거나 할 수 있을 터이다. 참여시라는 현상은 어쩌면 허상일지 모른다. 국내 참여시가 기형적 현실에 대응한 좁은 투쟁을 하였고, 권력에 목청을 높이는 현존 시인들이 여전히 좁은 이념의 갈등구조에 자의 반 타의 반 갇힌 셈이 아닐까 싶다. ‘비규범성’의 개념에 견주어 보자면, 정치 현실이나 경제 권력은 하루살이들일지 모른다. 인간과 삶을 크게 구속하는 구조가 있고, 그 구조를 전복하지 않는 한, 어렵게 극복한 현실이란 게 차악을 다른 차악에게 넘겨주는 제자리 걸음인 게 아닌가? ‘권력은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라는 말은 우울한 전망이다. 그걸 깨부수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현상과 싸우기 때문인지 모른다. “기성 사회에 대한 혁명적 저항”이 필요한 이유이다. 근본을 깨부수려는 게 철학이고, 그런 현실을 감각하는 게 순수시이다.
순수시는 진심 참여시이다. 진위의 문제는 물론 남는다. 그렇다면, 이름하여 참여시는 무엇인가? 참여시의 오늘날 현상으로 읽은 것이 권상진(1972-) 시인의 시집이다. 그는 2013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니까, 분명 무늬는 참여 시인이다. 이전 박노해, 현재 백무산이나 송경동처럼 드러난 참여 시인들과 다른 참여시를 그는 쓰고 있다.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 운명에 비굴한 소시민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를 일상시라고 불러야겠다. 서투른 일반화가 되겠지만, 참여시는 한편으로 일상시로 대체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의자 - 권상진
관절에 못이 박힐수록 의자는
점점 바른 자세가 된다
생각이 무거우면
부처도 자세를 고쳐 앉는데
의자라고
다리 한번 꼬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는가
못은 헐거워진 생각을 관통하고
너머의 삶을 다시 붙잡는다
돌아눕고 싶은 밤이 있었고
돌아서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온몸에 박혀 올 때마다
나는 자세를 고치며 다시 살아볼 궁리를 한다
하늘도 긴 날을 삐걱거렸는지
밤이면 못대가리들로 촘촘하게 빛난다
3.
권상진 시집에 널린 기법은 유비이다. 대상의 특성과 자기 심리를 비교하여 할 이야기를 끌어내는 그런 언술들은 직관적이고, 읽는 재미를 준다. 인용시 [나무의자]가 그런 사례이다. 삐걱대는 나무의자에 못을 박아서 의자의 자세를 바로잡는다는 경험과 자기 자세를 뭔가 고쳐 잡아서 삶을 바로잡는다는 관념이 유비되어 있다. 심지어 ‘하늘도 긴 날을 삐걱거렸는지 밤이면 못대가리로 촘촘하게 빛난다’는 우의(寓意)는 해학에 가깝다. 해학이란 자기 비하가 숨어 있지 않은가? 그 말은 반성을 벗어나 어째 비굴해 보인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 – 그 셋은 하나의 다른 이름이다. 자유를 우선하는 인간들의 속을 우리는 짐작한다. 평등을 우선하는 인간들이 편향된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우애(Friendship), 그 가치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우애를 우선하자는 게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함께할 때, 세상이 무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알아두자. 시가 일상에 처질 때, 시는 절망도 안 되고 희망은 더욱 아니다. 시가 반성하는 것은 자기 연민 때문이 아니다. 그 시집에 실린 [김수영을 읽는 저녁]처럼 김수영이 시에서 반성한 것을 다시 읽어보자.
(2024.2.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