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낡음과 낯섦 – 유홍준과 박소란

시집 『수옥』, 창비시선 504, 2024.7.15
“그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시의 일인칭을 ‘단일한 자아’가 아닌 ‘관계적 자아’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조대한, 『세계의 되풀이』, P87
박소란(1981-) 시인의 근간 시집을 읽었다. 첫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2015)과 다음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2019)을 오래전에 읽었지만, 그의 근간 시집은 이전 시집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첫 시집부터 시인은 주체적 시선을 내장하고 있었지 싶다. 첫 시집의 화자는 ‘관계적 자아’의 시선으로 세계의 우울 내지 편파에 반응하고 나름 대응하려 한다. 그 화자를 통한 언술이 다만 은유적 사고를 기반하거나 묘사적 집중을 한다는 점에서 훨씬 서정적이었다. 근간 시집은 은유적 사고가 탈각되고 (두번째 시집에서 이미 그런 징후를 보였다.) 서술적 특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확장적 서정이라 생각한다.
모든 시가 서정시라는 시각에서 볼 때, 서정적 서정시와 확장적 서정시는 자아와 주체 – 세계에 대한 화자의 스탠스로 갈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단일한 자아’란 아마도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이상적 화자를 말하며, ‘관계적 자아’는 세계의 제약 아래 세계를 극복할 힘은 없고 그저 꿈틀대는 현실적 화자를 말한다. ‘단일한 자아’는 은유적 사고를 하기 쉽다. 세계는 은유로써 관념화되고 관념 속에서 현실이 거세되어 아름답다. ‘관계적 자아’ – 주체는 현실의 제약을 벗지 못한다. 누가 세계와 관계로부터 속앓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속앓이가 대개 속물적 손익 때문인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관계적 자아’는 언제나 세계를 극복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합일의 이상향이 아니라 실패하고 절망해야 하는 장소이다.
시가 현실에 기반하는 것은 태생이 그럴 것 같아도 그리 오래된 역사를 갖지 않는다. ‘관계적 자아’로써 화자가 현실을 직시하는 시적 역사는 보들레르(1821-1867)에서 김수영(1926-1968)에서 겨우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보들레르는 자기 문학을 통해 현대적이라고 하는 개념, 현대 문학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황현산,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 P37) 황현산 선생이 말하는 보들레르의 현대시의 특징 세 가지는 보통사람이 등장하는 시, 현실을 명상이 아니라 감각으로 체험하는 시, 그리고 일상적 사사로운 시를 말한다. 김수영의 시는 여기에 보태서 일상어로써 시를 시현했다. 오늘날 시인들이 추세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제 관념이 제거되는 서정이 아닐까 싶다.
박소란 시인이 시집들을 펴내면서 강화하는 게 아마도 그것들이다. 은유적 사고를 탈각하기, 상황들을 나열하기, 다만 감각으로써 감각을 유도하기. 현실을 정돈하는 관념은 좋은 생각일 수는 있어도 현실과 멀어지는 속성이 있다. 그것이 은유적 사고의 약점이고 관념의 한계이고 현대시가 극복하려는 과제의 하나이지 싶다. 비슷한 소재의 시를 골라서 그 차이를 읽어보려 한다. 박소란의 시도 유홍준의 시도 둘 다 좋은 시지만, 현실을 관념화하느냐 하지 않느냐 거기서 그 시들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유홍준의 시는 은유적(생명=죽음)이다.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는 죽음의 관념은 사실적이기보다 ‘모두 죽는다’는 진리의 성찰과 반성을 유도한다. 죽음을 곁에 두고 ‘별일 없어요’ 사는 화자 – 그것을 읽는 독자는 삶의 허무를 읽을 수는 있어도 삶의 어떤 실재를 체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병원 - 박소란
온갖 날벌레들이 내 컵에 와 죽는다
작고 귀여운 익사체들
냅킨으로 슬쩍 건져놓으면 가끔 아주 가끔
다시 산다
불어난 눈물을 훔치고 훌쩍 날아가버린다 망연자실 빈 냅킨을 들여다보며
양치를 하는 아침
거품을 물고 긍긍한다
살리는 일이란, 살리는 일이란, 어쩌자고
얼룩을 움켜쥔 채 상념에 잠긴 냅킨을 버리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그 속에 대학병원 흰 복도가 있고 나의 그림자가 있다 플라스틱 의자에 다리를 개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늘어진 화살표는 장례식장이 지척이라고
잠깐씩 한눈을 팔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곤한 웃음을 흘릴 때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따끔한 목소리
검은 김이 피어오르는 컵에 이지러진 한장의 그림자를 던진다
못 들은 척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그대로 숨을 참으면
깊은 곳에 잠기면
온갖 밤이 내 속에 와 눕는다
눅눅한 명치끝에 묻힌다, 어린 시절 얻은 단 하나의 곰 인형처럼
트럭에 깔려 배가 터지고 눈알이 깨진
나를 꼭 껴안은
아침은 오고 또다시
냅킨을 구긴다 불끈 주먹을 쥐듯
보호자 분, 보호자 분?
구겨진 나를 편다
시의 입구에 ‘온갖 날벌레들이 내 컵에 와 죽는다’는 문장은 유홍준의 시에서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를 연상하게 한다. 박소란의 그 문장은 관념이라는 일반화로 묶이기보다 사실 그 자체에 가깝고, 근친에게 닥칠 것 같은 죽음에 대한 감각을 건네주는 환유적 사례이다. ‘건져놓으면 가끔 아주 가끔 다시 산다’는 날벌레들이 있어서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시 이후를 짐작할 수 없으나, 시가 시현하는 것은 근친의 위독과 보호자인 화자의 혼란이다. 거기서 감각되는 죽음에 가까운 삶의 한 단편이다.
서정적 서정시는 익숙하다. 삶과 세계는 거기서 성찰되고 의미가 해석되어 가지런해진다. 확장적 서정시는 삶과 세계의 한구석을 사례하면서 감각하되 각성하지 않는다. 관념은 현실의 귀납에서 오고, 현실에서 관념을 귀납하는 순간 현실은 거세되기 마련이다. 감각지향이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일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대시의 추세는 감각인 듯하다. 유홍준의 시는 전자에 가깝고 박소란의 시는 후자에 가깝다. 관념화되는 현실과 감각되는 현실 - 익숙한 것과 낯선 것 가운데 더 좋은 것이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익숙한 것은 읽는 대로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이 오고, 낯선 것은 한참 있어야 어떤 감각이 어렴풋이 온다. 낡아서 재인되는 세계와 새롭게 인지되는 세계는 다른가?
세계는 거기 있을 뿐. 다른 화자가 다른 방식으로 말할 뿐.
(2025.4.1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