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초판 44쇄 – 2012.9.17)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들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시에서 공감이 가장 쉬운 게 ‘연애에 대하여’ 아닐까 싶다.
위 시는 끝부분 3이 연애에 대하여, 그 쓸쓸한 추억에 대하여 시인이 말하려는 감상(感傷)이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이란 마치 첫사랑, 첫 키스를 나누던 여자에 대한 추억을 통속하게 – 그리하여 더욱 감각적이게 그려낸다. 기우는 햇살의 풍경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눈으로, 속눈썹으로, 다시 입술로 시선은 좁혀지고 조금씩 아래로 이동한다. 감각은 온통 예민해져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까지 듣는다. 연애가 그러하지 않던가? 통속하고, 기쁘고, 슬픈 감각!
위 시를 은유 개념으로 읽을 수 있다. 시의 1 은 ‘여자들은 현실적이다’는 은유 개념을 바탕으로 시상(詩想)을 전개한다.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을 넘어간다’는 언술, ‘나를 이불로 덮어 싼다’는 언술,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는 언술, 들은 기괴한 이미지가 아니라 화자의 ‘여자들’의 현실감을 드러내는 장치들이다. ‘숨이 막혀 죽겠어!’는 화자의 탄식이면서 ‘여자들’의 탄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인의 여자들에게 ‘숨 막혀 죽겠어!’라는 탄식은 일견 당연한 귀결일 것도 같다. 시의 2는 ‘나는 죽었다’는 은유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죽었다’는 뜻은 현실을 살면서 현실감을 잃을 때 가능한 말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어떤 현실의 부족을 화자에게서 느끼고, ‘여자들’을 충족할 현실을 화자가 갖지 못했을 때, 화자는 현실만 없는 게 아니라 또한 여자들 가운데 누구도 현실로써 사랑하고 사랑받기 어려울 터이다.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 술집’은 ‘여자들’ 가운데 누구도 얻지 못하고 술집에서 술 따라주던 거짓 ‘애인들’과 그 기억들이다.
위 시는 두 개의 은유 개념을 앞세운다. 여자들은 현실이고, 나는 현실에서 죽은 것과 같다는 은유 개념이 그것들이다. 시의 3에서 ‘너’를 잃은 이유, 우연히 만나도 내 눈길을 네가 피할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은유를 ‘여자는 현실이다’처럼 단어 차원에서 부리는 경우보다 은유 개념으로 시의 전체를 구성할 때, 시는 모호해진다. 시가 모호해지는 경지는 아름다움 그 이상 아닐까 모르겠다.
청춘이 잃은 사랑에 공감을! 시인이 얻은 경지에 감탄을!
(2017.6.9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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