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시한 이야기 2021

(7)
이순 12,462km – 김경후, 요하네스버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시선 412, 2017.8.7 “문학의 소재가 현실이고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은 따라서 현실에 대한 관심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서술이란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취하는 가장 명백한 형식이다.” -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 P80 나이를 먹으면 좀더 현명해질 것을 기대한다. 이순(耳順)이랬던가? 공자께서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고 하셨다는데, 나는 예순을 앞두고서 이순은커녕 역순(逆順)이 되는 것 같다. 보고 듣고 판단이 필요한 많은 일들에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렵고, 취해야 할 선택지를 앞에 두고 여전히 망설인다. 매사 최선과 차선, 최악과 차악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 오리무중하다. 최선을 모르고 선택한다는 ..
유레카! 난해를 요해하다? – 김경후, 반딧불이와 이규리, 제라늄 “문체를 기준으로 할 때 시는 묘사시와 서술시로 분류된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문체는 시인이 다루는 제재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대상과 대상의 특징은 묘사’되어야’ 하고 삶의 조건과 가정은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 사건을 시간적 연속과 인과성에 따라 결합시키는 조직의 기법으로서 서술과 재료를 비시간적으로 조직하는 원리로서 묘사는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문체로 알려져 있다.” -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문학과지성사, 2000.3.29) [서술시의 서사학], P60-61 시가 난해하다는 불만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길게 잡아봐야 현대 이전으로 거슬러 가기 어렵다. 1930년대 이상의 시가 한국시사에 처음 난해하다는 비난을 기록한 셈이고, 1960년대 김수영은 ‘난해시가 나..
항아리는 무심하다 – 조항록, 항아리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2011.9.25 “의미를 추구하면 예술은 낡고, 의미를 배제하면 예술은 공허해진다.” - 김행숙, 『마주침의 발명』, 74 시를 읽다 보면, 어떤 시는 쉽고 어떤 시는 어렵다. 직관적으로 읽히는 쉬운 시는 즐기면 되지만, 어려운 시는 우선 당혹스럽다. 시는 대개 짧고, 그런 단문이 읽어도 읽히지 않는 게 의아하기도 하다. 비평이나 해설을 참고해도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이상하게 드물고(돌아가신 황현산 선생의 비평은 그 드문 경우의 하나이다), 어려운 시를 원리로써 밝히는 시론은 유감스럽게도 없다. 단편적인 주장이야 있다. 가령,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이수명 류의 시론이나, 시는 새로운 혹은 낯선 무엇이라는 예술론 정도가 그것들이다. 어려운 시..
아무튼 혼외 – 권혁웅, 귓속의 알리바이 시집 『소문들』 (문지시인선 384, 2010.10.7) “시집을 4부로 구성했는데, 1-3부가 , , 연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 사회가 무협지 수준의 깡패 논리에 지배받는다는 것(1부), 인간의 본질이 동물의 모습이나 양태로 설명된다는 것(2부), 개별자들의 관계가 고작 드라마의 문법으로 포착된다는 것(3부)을 폭로하고 싶었죠.” - 강은교 외 지음, 『시인으로 산다는 것』, 37 내가 권혁웅(1967-) 시인을 처음 읽은 것은 시가 아니라 그의 시론이다. 그의 『시론』 (문학동네, 2010)은 내가 읽은 가장 탁월한 시론이다. 그 책은 현대 시론을 새롭고 넓고 깊게 정리하였고, 저자를 창작자보다 이론가로 인상 짓게 한다. 그를 시론으로 먼저 읽으므로 해서, 나는 권혁웅을 시인보다 학자로서..
힘도 없는 힘으로 힘이 세다 – 김신용, 콩나물에 대한 헌사 시집 『비는 사람의 몸속에서도 내려』, 걷는사람 시인선 9, 2019.6.13 “김신용의 시는 선전ㆍ선동적인 성격을 표출하지 않으며, 1980년대 노동시의 전형적인 어법에 침윤된 흔적 또한 상대적으로 적다. 월급통장이나, 노조 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김신용은 당대의 노동자 시인들 중에서도 최저의 생계조건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몸과 삶과 시가 남김없이 일치하는 준엄한 삶의 시간을 살아냈다. 시의 텍스트에 한정해볼 때도, 김신용의 시는 동시대의 노동시들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성취한 예로 부족함이 없다.” - 김수이,『서정은 진화한다』, 265 살면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공부하고 싶은데 옆에서 자꾸 거스르는 일은 흔하다. 일에 복잡한데 집안에 우환이 겹친다. 성장한 ..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짓 – 이덕규, 돌멩이 시집 『밥그릇 경전』. 실천시선 180, 2009.11.30 “그의 첫 시집의 다양한 지형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영토가 공존하고 있다. 첫째는 삶의 모순과 고통을 감내해온 자기 자신과의 내적 분쟁, 둘째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각성과 비판, 셋째는 전통 삶의 원리에 대한 애정과 그 현재적ㆍ내면적 활용이 그것이다.” - 김수이,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226 근래 비평가들의 비평집을 여러 권 읽어 보았다. 대개 그들 비평은 비평답고, 일반이 말하기 어려운 사변(思辨)이 널려 있다. 어떤 비평은 그 비평하고 있는 텍스트를 찾아 읽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다. 김수이 비평이 꼭 그러하다. 그의 비평 3권을 최근작에서부터 첫 비평까지 거꾸로 읽다가, 2011년 출간한 2번째 비평집에서 이덕규 해설을 읽게 ..
시인의 훈장 – 박은영, 보수동 골목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 시선 259, 2020.7.13 시인의 가난은 어쩌면 훈장이다. 첫 시집에는 대개 시인의 가난의 이력이 있다. 그 가난은 시인의 성장담이고, 가족사이고, 나아가 다중의 사회사를 넌지시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의 시대가 70년대냐, 80년대냐, 90년대냐, 혹은 지금이냐 등에 따라 차이는 있다. 더 멀리 거슬러 갈수록 가난은 무지와 자조의 그늘에 들고, 가까울수록 가난은 억압과 굴레의 어둠에 잠긴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면서 말했다.” (기형도, [위험한 가계ㆍ1969] 중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던 아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