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 12,462km – 김경후, 요하네스버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시선 412, 2017.8.7 “문학의 소재가 현실이고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은 따라서 현실에 대한 관심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서술이란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취하는 가장 명백한 형식이다.” -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 P80 나이를 먹으면 좀더 현명해질 것을 기대한다. 이순(耳順)이랬던가? 공자께서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고 하셨다는데, 나는 예순을 앞두고서 이순은커녕 역순(逆順)이 되는 것 같다. 보고 듣고 판단이 필요한 많은 일들에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렵고, 취해야 할 선택지를 앞에 두고 여전히 망설인다. 매사 최선과 차선, 최악과 차악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 오리무중하다. 최선을 모르고 선택한다는 ..
항아리는 무심하다 – 조항록, 항아리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2011.9.25 “의미를 추구하면 예술은 낡고, 의미를 배제하면 예술은 공허해진다.” - 김행숙, 『마주침의 발명』, 74 시를 읽다 보면, 어떤 시는 쉽고 어떤 시는 어렵다. 직관적으로 읽히는 쉬운 시는 즐기면 되지만, 어려운 시는 우선 당혹스럽다. 시는 대개 짧고, 그런 단문이 읽어도 읽히지 않는 게 의아하기도 하다. 비평이나 해설을 참고해도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이상하게 드물고(돌아가신 황현산 선생의 비평은 그 드문 경우의 하나이다), 어려운 시를 원리로써 밝히는 시론은 유감스럽게도 없다. 단편적인 주장이야 있다. 가령,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이수명 류의 시론이나, 시는 새로운 혹은 낯선 무엇이라는 예술론 정도가 그것들이다. 어려운 시..
아무튼 혼외 – 권혁웅, 귓속의 알리바이
시집 『소문들』 (문지시인선 384, 2010.10.7) “시집을 4부로 구성했는데, 1-3부가 , , 연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 사회가 무협지 수준의 깡패 논리에 지배받는다는 것(1부), 인간의 본질이 동물의 모습이나 양태로 설명된다는 것(2부), 개별자들의 관계가 고작 드라마의 문법으로 포착된다는 것(3부)을 폭로하고 싶었죠.” - 강은교 외 지음, 『시인으로 산다는 것』, 37 내가 권혁웅(1967-) 시인을 처음 읽은 것은 시가 아니라 그의 시론이다. 그의 『시론』 (문학동네, 2010)은 내가 읽은 가장 탁월한 시론이다. 그 책은 현대 시론을 새롭고 넓고 깊게 정리하였고, 저자를 창작자보다 이론가로 인상 짓게 한다. 그를 시론으로 먼저 읽으므로 해서, 나는 권혁웅을 시인보다 학자로서..
시인의 훈장 – 박은영, 보수동 골목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 시선 259, 2020.7.13 시인의 가난은 어쩌면 훈장이다. 첫 시집에는 대개 시인의 가난의 이력이 있다. 그 가난은 시인의 성장담이고, 가족사이고, 나아가 다중의 사회사를 넌지시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의 시대가 70년대냐, 80년대냐, 90년대냐, 혹은 지금이냐 등에 따라 차이는 있다. 더 멀리 거슬러 갈수록 가난은 무지와 자조의 그늘에 들고, 가까울수록 가난은 억압과 굴레의 어둠에 잠긴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면서 말했다.” (기형도, [위험한 가계ㆍ1969] 중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던 아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