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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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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라는 원죄 – 이근화 [두부처럼] 시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창비시선 402, 2016.9.30)  [두부처럼]          - 이근화 땅이 두부처럼 갈라졌다고 했다. 무른 땅을 디딜 발이 사라졌다고 했다. 네팔의 국기가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삼천명이 죽고 일만명의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했다. 두부란 무엇인가. 냉장고 속 찬물에 동동 떠서 불안을 보도하는 두부. 죽음을 전하는 두부. 팔십시간의 기적이라고 했다. 멀겋고 말캉한 두부. 히말라야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꼭꼭 밟아대서일까. 두부가 으깨진 것은. 차고 딱딱한 두부를 먹을 수 있을까. 그것을 끓는 물에 데우거나 간장에 조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람을 덮고 건물을 뭉갠 두부는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모으고 모인 사람들은 엎드리고 눈이 먼 사람들은 흩어진다.오월이..
서정에 기여 못하는 권력 – 이근화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 시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창비시선 402, 2016.9.30) 시국이 정말 수상하다.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 투표를 하루 앞두고 있다. 수백만 국민이 여섯 차례나 촛불을 들어 만들어낸 시국이다. 그 가결과 부결을 국회가 가루고 다시 헌법재판소가 판결한다는 법 절차가 우습다. 민의 위에 국회 위에 헌재가 가장 높은 것 같은 법치의 아이러니다. 국회가 제출한 탄핵 혐의에 ‘세월호 7시간’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녀가 통치한 기간,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락한 기간은 천일야화처럼 길었다. 그 가운데 7시간은 어느 한나절만큼 짧지만, 그녀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시간이다. 그 7시간은 잘못된 통치를 상징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탄핵의 제일 요건이다.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휘파람 소리 휘휘 오줌 소리 쉬잇 – 박시하 [날씨] 시집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 2016.4.5)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투사,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을 동화라고 한다. (…) 서정시는 동일시의 산물이며, 이때 세계는 주체의 모노드라마가 된다.” (권혁웅, 시론, 132) [날씨] - 박시하 동산에서 휘파람 소리가..
가망 없는 희망을 품다 – 박시하 [마른 손] 시집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 2016.4.5) “형태 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 불능 등등으로 규정되는 (…)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기 같은 것” (신형철, 『느낌의 ..
죄와 벌 – 김형영 [수평선·7] 시집 『땅을 여는 꽃들』 (문학과지성사, 2014.9.30) [수평선·7] - 김형영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날은 시퍼런 바다를 향해 소리쳤나니 파도는 겹겹이 달아나며 하늘에 대고 다 일러바쳤네. 허나 이제 핏대는커녕 후회할 여력도 나는 잃어 이 후미진 바닷가에 떠밀려 와서 멀뚱멀뚱 大자..
늙는 나이, 늙지 않는 태도 – 김형영 [화살기도] 시집 『땅을 여는 꽃들』 (문학과지성사, 2014.9.30) “김형영이 서정주의 관능, 고은의 허무주의, 박목월의 초속주의, 김수영의 비판 의식을 거쳐서 발견한 세계는 부정을 통한 긍정의 세계이다. 그가 자기 파괴의 욕망을,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긍정적 시선으로 극복한 것이 ..
귀납적 탈선, 그 쓸쓸함의 방법 – 류근 [옛날 애인]과 [낱말 하나 사전]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9.9)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일반화하는 귀납적 원리에 의하여 문예 비평이 성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행자의 도움 없이 사실상 자력으로 성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詩學』,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중에서) [옛날 애인]          - 류근 이젠 서로 팔짱을 낄 일도 없고술 먹다 눈 마주치면 그 눈빛 못 견뎌서벽이나 모텔로 벌겋게 숨어들 일도 없고심야택시 잡을 일 없고친구 생일 따위에 따라가 고깔모자 쓸 일도 없고비 오는 날 우산 들고 기다릴 일도 없고괜히 등산복 사 입고 산에 갈 일 없고벅찬 오페라에 돈 쓸 일 없고웃어줄 일 없고편지 쓸 일 없고꽃 이름 나무 이름 산 이름 골목 이름 하물며당신 초등학교 단짝..
시인에게 주어야 하는 면책특권 – 류근 [여자와 개와 비와 나]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9.9)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괴테) 면책특권을 국회의원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더한 면책특권을 가진다.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84조) 암만 닭짓을 해도 대통..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돌 – 김혜순 [아님] 시집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6.5.24) 죽음이란 죽은 자에게 온 것이 아니라 산 자에게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산 자의 몫이다. 죽음이란 죽은 상태를 말하지만, 그걸 감당해야 하는 자는 언제나 산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김혜순의 사십구 편 죽음의 시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이 ..
우리는 흐느끼는 소리로 뭉쳐졌다 – 김혜순 [간 다음에] 시집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6.5.24)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시집 뒤 ‘시인의 말’ 중에서) 황현산 평론가의 트윗에서 읽었다. 어느 시 낭독회에서 김혜순 시인이 시를 낭독하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