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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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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글쓰기 – 서영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시집 『말뚝에 묶인 피아노』 (문지사, 2015.3.2) 대개의 시론은 언어학에 많이 기대고, 근래 비평은 정신분석 이론에 많이 빚지고 있어 보인다.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가타리로 징검다리를 놓는 정신분석 이론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 같지만, 시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번잡하다. 이승훈 시인이 『라캉으로 시읽기』(문학동네, 2011.9.23)를 암만 역설해도 그를 통해 라캉을 읽는 것도 벅차다. 그 책에서조차 시를 읽는 것은 몇 편 안되고 라캉만 읽고 있으니까, 사실 그 책은 그냥 ‘라캉읽기’에 머무르고 있대도 틀린 평가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시에서 정신분석 이론은 버거운 면이 있다. 그렇다고 정신분석 이론을 몰라라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정신(심리)을 분석하는 과학이며, 시의 ..
그리움과 연민의 차이 – 황학주 [고향 - 고사목]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 2014.3.20)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오롯이 아름다울 수 만은 없다. 그 대상이 설혹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모든 기억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치가 그러하듯 어머니는 늙고, 본성이 그러하듯 어머니는 자식을 편애한다.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
내적 언어와 외적 언어 – 황학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 2014.3.20) 저 밑 어딘가에 써놓은 것처럼,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마치 사람을 사귀는 일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낯설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시집마다 인상이 또한 다르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아름다움을 맛보는 일이고, 한 권의 시집을..
강화도 여행을 마치고 - 김중일 [눈썹이라는 가장자리] [눈썹이라는 가장자리] - 김중일 눈동자는 일 년간 내린 눈물에 다 잠겼지만, 눈썹은 여전히 성긴 이엉처럼 눈동자 위에 얹혀 있다. 집 너머의 모래 너머의 파도 너머의 뒤집힌 봄.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바람의 눈썹이다. 바람은 지구의 눈썹이다. 못 잊을 기억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까지 다 밀려온다. 계속 밀려온다. 쉼 없이 밀려온다. 얼굴 위로 밀려온다. 눈썹은 감정의 너울이 가 닿을 수 있는 끝. 일렁이는 눈썹은 표정의 끝으로 밀려간다. 눈썹은 몸의 가장자리다. 매 순간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이 울컥 모두 눈썹으로 밀려간다. 눈썹을 가리는 밤. 세상에 비도 오는데, 눈썹도 없는 생물들을 생각하는 밤. 얼마나 뜬 눈으로 있으면 눈썹이 다 지워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밤. 온몸에 주운 눈썹을 매단..
관념과 대상 사이에서 놀다 – 원구식 [아령의 역사] 시집 『비』 (문지사, 2015.3.9) 관념이 앞서는 시가 있고 대상이 앞서는 시가 있다. 관념과 대상은 시적 지향의 양 극단이다. 관념 쪽으로 다가갈수록 대상이 망가지고, 대상으로 다가갈수록 관념은 지워진다. 관념이 앞서는 시는 대상을 여럿 조합하거나 수단으로써 부린다. 대상이 앞서는..
남자가 울어야 하는 이유 - 원구식 [목울대] 시집 『비』 (문지사, 2015.3.9)   원구식(1955-) 시인을 내가 처음 읽은 것은 트위터에서다. [삼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인데, 이 시는 누가 읽더라도 절묘하고 쉽고 기발하리라. ‘삼겹살의 맛은 희한하게도 뒤집는 데 있다 (…) 삼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 세상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그 시를 읽으며, 세상은 못 뒤집고 겨우 삼겹살이나 뒤집으며, ‘세상이 회까닥 뒤집혀버리는 도취의 순간을’ 시의 삼겹살로 맛보며, 즐거웠다. 그리고 시도 시인도 잊고 있다가, 근간 시집 『비』를 펼쳐보니 거기 그 시가 있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그 ‘삼겹살’ 같은 성향의 시를 몇몇 보여준다.    세상이 번듯하게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은 뭔가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원리로써 연구하면 과학자가 되겠고, ..
시와 노시인에 관한 짧은 성찰 – 정현종 [어떤 풍경]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 (문지사, 2015.6.10) 정현종(1939-)은 친숙한 이름의 시인이다. 시인을 본격적으로 읽어 본 적은 없더라도 웬만하면 그 이름은 안다. 아마도 1965년 등단하여 50년간 쉬운 시를 써온 시인의 공력 때문일 것 같다.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 외벽을 25년째 장식하는 ‘광화문..
같은 대상 다른 그림 – 배용제의, 신미나의 [부레옥잠] 시집 『다정』 (문지사, 2015.6.21) 같은 대상을 중심에 놓은 여러 시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대상이 구체적일수록 그 시들을 가름하는 일은 흥미롭다. 시인마다 개성이, 시어가 주는 차별이, 시가 보여주는 이채(異彩)가 그러하다. 가령, 부레옥잠이 있다. 흔히 부평초라 불리는 다년생 수생식..
제 팔뚝에 담뱃불 지지지 않은 사내에게 – 배용제 [담배 자국] 시집 『다정』 (문지사, 2015.6.21) 배용제 시인(1963-)의 시집은 특유의 언어로 가득하다. 그의 언어는 비유보다는 묘사라는 데서 다르고, 아름답다. ‘묘사의 언어, 상상의 언어’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은 그의 시집은 읽는 내내 감동의 파고를 증폭한다. 그의 언어는 시를 읽는 일이 분명 기..
시는 소품이 아니라 혁명이다 – 이하석, [달] 외 시집 『연애 間』 (문지, 2015.8.28) 시조는 이미 낡은 장르이다. 시조를 '한국문학사상 가장 치졸한 양식화'라고 일찍이 일갈한 이는 비평가 김현(1942-1990)이다. (김현,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44) 그런 혹평이 있은 이후에도 시조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시인들 중에, 특히 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