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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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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입과 시인의 입 –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시집 『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 창비시선 511, 2024.12.27 “소통은 한 주체가 자신의 주체 자리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자리로 자리바꿈을 하려는 그 순간 발생하는 것이며 그 순간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은영, [소통, 그 불가능의 가능성], 『문학의 아토포스』, P302 진은영의 책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5.4.15)는 연구 소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창비 142호에 발표되어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던 [감각적인 것의 분배 : 2000년대 시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2008년부터 2013년 사이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학술적 소논문들이 집합되어 있다. 진은영 책을 몇 권 이미 읽어본 기대에 비추어보면, 번쇄한 이론에 치여 대중성은 아예 없는 ..
기억 속 십우도 – 송진권, 여름 해는 얼마나 긴가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 창비시선 483, 2022.10.24 1. 한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 어느 사찰에 갔다가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십우도(十牛圖)를 본 적이 있다. 얼핏 십우도에 관해 들어는 보았지만, 무슨 설명을 드렸으면 좋겠는지 앎이 부족하여 그 외벽을 한바퀴 돌며 그림만 보여드렸다. 1) 심우(尋牛) : 소의 자취를 찾는다.2) 견적(見跡) : 소의 발자국을 보다.3) 견우(見牛) : 소를 보다.4) 득우(得牛) : 소를 잡았으나, 뜻대로 다루지 못하고 채찍을 가하다.5) 목우(牧牛) : 소를 길들여 잘 따르게 하다.6) 기우(騎牛)귀가(歸嫁)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7) 망우(忘牛)존인(存人) : 집에 돌아오니 소는 사라지고 사람만 한가롭다.8) 인우(人牛)구망..
제수씨에게, 그중에 제일은 건강입니다 – 차정은 [토마토 레시피] 시집 『토마토 컵라면』, BOOKK 2024.4.8 1. 제수씨, 형제가 사는 모양이 서로 달라서 더욱 가까워지기 쉽지 않습니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경제적으로 완전 분할되고, 공통분모라야 부모라는 거의 썩은 토양만 남아서, 명절 같은 집안일에나 겨우 보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고운 부모든 미운 부모든, 부모는 역할을 해서 부모이고, 또한 존재했고 존재하여 부모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모는 역할보다 존재하여 그저 부모였다는 점에서 형제에게 허물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어머니 없고, 아버지 요양원에 정신을 놓아서, 역할 없는 부모 자리조차 빈 자리로 남았습니다. 빈 자리는 이상하게도 비어 있어도 자리입니다. 부모가 있을 때 역할 없었고, 없을 때 허물이었지..
서술시의 기회비용 – 한여진, 캐논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시인선 201, 2024.12.3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중에서 젊은 한때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누구나 시인 이상(李霜, 1910-1937)을 거쳤을 거라 짐작한다.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이상을 읽기 시작했고, 대학 들어서 그를 내 글의 이상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 여전히 그의 시적 성취는 나의 문학적 전범이기도 하다. 이상이 제 시를 처음 발표한 때는 1931년이고,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때는 1933년경이라고 한다. 일제 식민시절 복판을 살다 간 이상은 두 가지 공포 - 억압을 극복하고자 제 삶과 문학을 번민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일제의 공포 – 벌을 받는 자가 있으나 자기 죄를 찾아야 하는, ..
세상을 바라보는 최적의 시선, 연민 – 김사인, 노숙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2024.5.16 초판 30쇄 “화자가 청자나 제재에 대해 취하는 특정 태도를 어조라고 부른다.” - 권혁웅, 『시론』, P165 김사인(1955-) 시집을 읽는 일은 오래된 상자를 열어보는 일 같다. 나의 할머니 돌아가시고 수십 년 후, 고집 센 아버지 쓰러지시고 몇 주 후, 오래된 집 세간과 잡동사니를 정리하던 중 마루 문틀 위에 얹혀 있던 작은 나무상자를 열어본 일이 있다.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아 있는, 값진 것을 기대하기에 너무 늦은 것 같은, 손에 느껴지는 가벼움으로 빈 것 같은 나무상자였다. 낡고 흐릿한 문양이 새겨진 뚜껑에서 먼지를 불어내고, 앞면에 걸린 자물쇠 고리를 젖혀서 열어보았다. 비단천에 싸인 지폐 몇 장이 있었다. ..
잘 자라, 친구여 – 이근우, 가시 “거주란 하나의 사랑으로 장소에 정박하는 일이다.” - 박동억, [장소의 귀환], 『침묵과 쟁론』, P200 1.가시 - 이근우 그가 가시가 되어심장을 찌른다. 움직이면 가슴을쿡쿡 후빈다. 빼어내면 가시겠지만가슴이 시릴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 아프더라도 찌르더라도지니고 살아가야 하겠다. 가시의 날카로움은눈물로 녹여낸다. 품는다. 온몸으로… 이 시는 내 친구의 것이다. 시인은커녕 책읽기도 그리 가깝지 않을 그저 생활인이다. 친구가 쓴 위 문장을 지인들 카톡에 올렸다. 그것을 나는 시로 읽는다. 비록 거기 언어는 시적 비약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의미는 망부(亡婦)의 심정을 단출하게 토로한 것이지만, 친구가 십수 년 전 겪은 화마로 아내를 잃은 비극을 알고, 오랜 시간 아들과 ..
서정시의 낡음과 낯섦 – 유홍준과 박소란 시집 『수옥』, 창비시선 504, 2024.7.15 “그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시의 일인칭을 ‘단일한 자아’가 아닌 ‘관계적 자아’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대한, 『세계의 되풀이』, P87 박소란(1981-) 시인의 근간 시집을 읽었다. 첫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2015)과 다음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2019)을 오래전에 읽었지만, 그의 근간 시집은 이전 시집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첫 시집부터 시인은 주체적 시선을 내장하고 있었지 싶다. 첫 시집의 화자는 ‘관계적 자아’의 시선으로 세계의 우울 내지 편파에 반응하고 나름 대응하려 한다. 그 화자를 통한 언술이 다만 은유적 사고를 기반하거나 묘사적 집중을 한다는 점에서 훨씬 서정적이었다. 근간 시집은 은유..
여전하게 삽시다 – 신미나, 빙점 계간 『창작과비평』 2025봄호 빙점 - 신미나 본인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그가 내 잔에 소주를 채우며 넌지시 물었을 때 탄로 난 사람처럼 눈물이 고였다정신의 두터운 얼음장에 금이 쩍 갈라졌다화들짝 불에 덴 것도 같았다 투명한 실금이 내부에서 뻗쳐나갔다무언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람이 말하는데 철렁하는 맛이 있어야죠사람이 말하는데 몇 년 뒤 술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여전하네요 그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선량하다는 건 무엇일까더는 사람의 말에 찬란하게 속지 않는 것불에 덴 손을 바로 차가운 물에 식힐 줄 안다는 걸까 뜨겁고 차가운 것이 양손을 맞대고 있다 언제부터 얼음은 녹기를 결심하는가형태는 어떻게 성질을 바꾸는가 눈 온다비가 오는 줄 알았는데 계엄이니 탄핵이니 헌..
시가 안 되는 조건 한 가지 – 최승호, 태양의 납골묘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R16, 2018.7.20)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 하우저 지음/백낙청 염무웅 옮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P107 김인환 교수(1946-)는 『비평의 원리』(나남신서, 2007)에서 김동명(1900-1968)을 평가하면서 “전투적 정열의 결여로 인하여 김동명의 시는 늘 소품에 그치고 만다”라고 한 바 있다. 작고한 시인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결산이더라도, 예술가에게 전투적 정렬이 결여되었다는 말은 예술성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못지않는 악평이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결여 말고, 전투적 정열을 상실하는 경우 또한 있다. 흔히 ..
환유적 시, 은유적 시 그리고 시적 시 (2) – 김언희 [허불허불한], 채길우 [분재]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son도 은유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보았지만, 이들에게서 은유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권혁웅,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 P18 그리고 은유적 시, 막기차를 놓치고저녁을 때우는 역 앞 반점들기만 하면 하염없이 길어나는 젓가락을 들고벌건 짬뽕 국물 속에서 건져내는 홍합들…… 불어터진음부뿐이면서 생은, 왜외설조차 하지 않을까골수까지 우려준 국물 속에서끝이 자꾸만 떨리는 젓가락으로 건져올리는허불허불한 내 시의회음들, 짜장이더글더글 말라붙어 있는 탁자 위에서일회용 젓가락으로 지그시벌려보는, 이상처의 모독의 시, 시, 시, 시울들…… - 김언희, [허불허불한] 인용시는 막기차를 놓치고 중국집에서 혼자 저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