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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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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격 혹은 능력 – 김중일, 미안의 안녕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 (창비시선 388. 2015.5.8)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 발터 벤야민 (이성혁,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61, 재인용) 시인이란 자격이 아니라 능력인 것도 같다. 자격이란 부여되는 것이고 능력이란 갖추는 것이다. 시인의 자격이 국내 ‘등단’이라는 제도가 부여하고 독자가 인정하는 외연이라면, 시인의 능력은 자기 속에서 지향하는 내포인 셈이다. 시인을 (자격으로써) 시인이라 부르는 것은 시인도 현실을 살기 때문이지만, 시인은 자격에 있기 보다는 능력에 있는 게 옳다. 시인의 능력 – 그것은 시적인 것을 감각하고, 감각하는 것을 갱신하는 능력이다. 시가 다 시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를 짓고, 그것..
없는 어머니와 있는 어머니 – 송승환, 병풍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문학동네시인선 120, 2019.12.30 모든 존재자는 세계 속에서 규정된 ‘대상’인 동시에 그 규정성을 벗어난 ‘존재’다. ‘있다’는 말이 존재로서의 존재자를 표현한다면, ‘이다’라는 말은 규정성과 결합하여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를 표현한다. - 이진경,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P140 누가 나를 규정하는 경우를 가끔 당한다. 가령, 부모나 친구가 ‘얘는 내성적이라 어디 가서 말을 잘 못해’라는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규정을 들을 때, 대개 속으로 불만을 잔뜩 품기 십상이다. 자신이 ‘내성적’인 성향이 있다는 걸 인정해도 늘 어디서나 그런 것은 아니고, 할 말은 곧잘 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못나고 좁게 한정되는 게 마땅치 않다. 누가 나를 규정하는 경우, 당..
조개를 요리하는 두 가지 방법 – 김지녀 [발설]과 문태준 [맨발] “시에서 주체의 정서 표출을 목적으로 하는 시를 서정시라고 정의하자. (…) 서정시의 반대편에는 실험적인 시가 있는 게 아니라 대상의 모습을 특별히 재구성하여 드러낸 시들이 있다. 이성적인 주체와 이성적인 언어를 활용해 우리로 하여금 대상에 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시가 있으며, 이런 시를 비서정시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권혁웅, 『시론』, 137 시와 서정시가 같은 뜻이라는 게 일반 상식이다. 일반은, 시가 서정의 영역, 즉 정서에 관여한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런데, 시가 곧 서정시라는 말은 어쩐지 어색하다. 시는 보다 넓고, 서정시는 그 하류로써 좁아 보이기 때문이다. 분류에서 속과 종이 같다고 하면, 실상은 모르겠지만, 논리적 오류다. 속에서 종으로 하향하면서 최소한 두 개의 가지치기가 ..
풍향계는 두 얼굴 – 이덕규, 풍향계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10.28 근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야 늘 있고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지만, 하나는 진보 진영 한 인물이 주역이고, 또 하나는 보수 진영 한 인물이 주역이다. 역할은 주역에서 같고, 파장도 규모를 가를 수 없을 만큼 함께 크다. 다른 점은 책임에 대한 수용과 불용에 있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것을, 원리로는 변화에 대한 태도로 나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변화를 인정하지만, 진보가 빠른 변화를 바란다면, 보수는 느린 변화를 바란다. 원리야 어쨌거나, 현실로는 진실에 대한 태도에서 둘은 다르다. 지난 7월, 박00 시장이 자살해버렸다. 그때,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그가 실종되었다는 속보가 나오고, 불길한 암시가 이어지고, 다음날 그 비보..
성차별과 성차이 – 고정희 [흩으시든가 괴시든가]와 이덕규[어처구니] “이덕규의 시를 등단 이전 처음 읽었을 때 만났던 그 남성적 체취를 기억한다. 지금도 우리 시가 지니고 있는 정서와 사유의 여성 편중과 어떤 유약성이 걱정되기도 했던 터라 그러한 그의 시와의 만남이 남달리 든든하고 신선했었다.” -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뒤표지의 정진규 시인 해설 중에서 남성과 여성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같으면서 다르다는 말은 한 종(種)이지만 차이가 있어 다르다는 사실판단이고, 다르면서 같다는 말은 차이는 있지만 차별하지 않는다는 가치판단이다. 의미의 방점이 다를 뿐, 방향이 반대라도 그 둘은 같은 말이다. 시인 중에서 여류 시인을 따로 꼽는 관행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정서와 사유의 여성 편중과 어떤 유약성’ 같은, ‘현대시가 여성시의 성취에 ..
예술 혹은 사랑의 조건 – 이윤학 [짝사랑]과 차창룡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사랑] 이진경(1963-)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가 활동하는 영역은 넓다. 마르크스 이론을 기반으로 철학을 하고, 영화를 비평하고, 수학사를 쓰고, 불교를 연구하고, 시를 해석한다. 그를 읽기 시작한 작년부터 내내 흥미진진했다. 올해 초 『불교를 철학하다』(휴, 2016)를 읽는 일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위험한 작업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공, 자비 등등 불교 개념을 외부인이 해석했다가 자칫 헛발질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의 공안(公案) 해설은 마치 난해시를 해설하는 만큼 숨은 논리와 의미를 잘 잡아낸다. 그는 외부인의 한계를 학문으로 이겨낸다. 이번에 읽는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문학동네, 2019)는 예술론이며, 존재론에 기반한 문학 비평이다. 철학 곁에 종교가 있고 또 예술이 있다 하더..
시가 언어를 갱신하지 않을 때 – 이윤학, 사과꽃과 잠만 자는 방 “하나의 텍스트는 해당 분야에 대해 그때까지 통용되던 관념에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에 한해서만, 문학사나 과학사에 등장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텍스트는 자동으로 다른 어떤 범주, 즉 ‘대량’으로 유통되는 이른바 ‘대중’ 문학의 범주나 학교의 교재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15 언어를 갱신하는 시가 있고, 세계를 해석하는 시가 있다. 언어를 갱신할 때, 시가 오롯이 시가 된다는 의식을 시인이면 하기 마련이다. 시의 문법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은유가 사물을 이름 부르는 데서 기원했거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대체했거나, 다른 이름만 남기기도 했거나, 아예 시 전체를 은유로 품었거나, 하는 것들은 시가 언어를 갱신하는 진화의 한 계통이다. ..
시를 쓰다 시를 잃다 – 김민정, 이제니가사람된다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는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지시인선 536, 2019.12.10 1. 잘 그린 그림은 예술일까? 인터넷에서 짧은 동영상을 본다. 물감을 뿌리고 붓질을 대충대충 하는데, 무얼 그리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가 순식간에 그린 것을 휙 뒤집어 놓으니까, 멋진 초상(肖像)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인도에 풍경화나 정물화를 늘어놓은 노점을 본다. 이발소 그림 같아도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잘 익은 과일 바구니가 그림 속에 있다. 그것들조차 내 재주를 넘는다. 범인은 암만 궁리해도 비슷한 초상을 그리기 어렵다. 풍경을 그릴 꿈도 꾸기 어렵다. 그렇다면, 숙달된 초상화는 예술일까? 어쩐지 값싸 보이는 풍경화나 정물화는 작품일까? 그것들은 그저 기량(技倆)이다. 많이 하면,..
올바른 시와 게으른 독자에게 – 이기인, 빗질 시집 『혼자인 걸 못 견디죠』, 창비시선 428, 2019.1.11 “『파일명 서정시』는 (…) 리얼리즘 시의 저력과 새로움을 함께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되어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 제21회 백석문학상 심사경위 중에서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시적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 2020년 한경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중에서 새롭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거나 문학은 세계를 전복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지겹게(?) 강조한다. 삶이 거반 상투적이라서 예술만큼은 삶과 그 세계를 전복하는 대리만족이 있어야 할 것도 같다. 새롭다는 말에는, 시가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세계관의 측면과 그 세계를 다른 언어로 그려낸다는 언어관의 측면이 양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