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어머니와 있는 어머니 – 송승환, 병풍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문학동네시인선 120, 2019.12.30 모든 존재자는 세계 속에서 규정된 ‘대상’인 동시에 그 규정성을 벗어난 ‘존재’다. ‘있다’는 말이 존재로서의 존재자를 표현한다면, ‘이다’라는 말은 규정성과 결합하여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를 표현한다. - 이진경,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P140 누가 나를 규정하는 경우를 가끔 당한다. 가령, 부모나 친구가 ‘얘는 내성적이라 어디 가서 말을 잘 못해’라는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규정을 들을 때, 대개 속으로 불만을 잔뜩 품기 십상이다. 자신이 ‘내성적’인 성향이 있다는 걸 인정해도 늘 어디서나 그런 것은 아니고, 할 말은 곧잘 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못나고 좁게 한정되는 게 마땅치 않다. 누가 나를 규정하는 경우, 당..
풍향계는 두 얼굴 – 이덕규, 풍향계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10.28 근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야 늘 있고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지만, 하나는 진보 진영 한 인물이 주역이고, 또 하나는 보수 진영 한 인물이 주역이다. 역할은 주역에서 같고, 파장도 규모를 가를 수 없을 만큼 함께 크다. 다른 점은 책임에 대한 수용과 불용에 있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것을, 원리로는 변화에 대한 태도로 나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변화를 인정하지만, 진보가 빠른 변화를 바란다면, 보수는 느린 변화를 바란다. 원리야 어쨌거나, 현실로는 진실에 대한 태도에서 둘은 다르다. 지난 7월, 박00 시장이 자살해버렸다. 그때,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그가 실종되었다는 속보가 나오고, 불길한 암시가 이어지고, 다음날 그 비보..
예술 혹은 사랑의 조건 – 이윤학 [짝사랑]과 차창룡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사랑]
이진경(1963-)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가 활동하는 영역은 넓다. 마르크스 이론을 기반으로 철학을 하고, 영화를 비평하고, 수학사를 쓰고, 불교를 연구하고, 시를 해석한다. 그를 읽기 시작한 작년부터 내내 흥미진진했다. 올해 초 『불교를 철학하다』(휴, 2016)를 읽는 일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위험한 작업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공, 자비 등등 불교 개념을 외부인이 해석했다가 자칫 헛발질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의 공안(公案) 해설은 마치 난해시를 해설하는 만큼 숨은 논리와 의미를 잘 잡아낸다. 그는 외부인의 한계를 학문으로 이겨낸다. 이번에 읽는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문학동네, 2019)는 예술론이며, 존재론에 기반한 문학 비평이다. 철학 곁에 종교가 있고 또 예술이 있다 하더..
시가 언어를 갱신하지 않을 때 – 이윤학, 사과꽃과 잠만 자는 방
“하나의 텍스트는 해당 분야에 대해 그때까지 통용되던 관념에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에 한해서만, 문학사나 과학사에 등장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텍스트는 자동으로 다른 어떤 범주, 즉 ‘대량’으로 유통되는 이른바 ‘대중’ 문학의 범주나 학교의 교재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15 언어를 갱신하는 시가 있고, 세계를 해석하는 시가 있다. 언어를 갱신할 때, 시가 오롯이 시가 된다는 의식을 시인이면 하기 마련이다. 시의 문법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은유가 사물을 이름 부르는 데서 기원했거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대체했거나, 다른 이름만 남기기도 했거나, 아예 시 전체를 은유로 품었거나, 하는 것들은 시가 언어를 갱신하는 진화의 한 계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