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혼자인 걸 못 견디죠』, 창비시선 428, 2019.1.11
“『파일명 서정시』는 (…) 리얼리즘 시의 저력과 새로움을 함께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되어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 제21회 백석문학상 심사경위 중에서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시적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 2020년 한경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중에서
새롭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거나 문학은 세계를 전복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지겹게(?) 강조한다. 삶이 거반 상투적이라서 예술만큼은 삶과 그 세계를 전복하는 대리만족이 있어야 할 것도 같다. 새롭다는 말에는, 시가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세계관의 측면과 그 세계를 다른 언어로 그려낸다는 언어관의 측면이 양립한다. 시의 어려움은, 시를 읽는 어려움은 새로운 세계관에 보태 새로운 언어를 맞닥뜨릴 때 특히 도드라지기 십상이다. 시의 문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것은 언제나 전복 이전 시의 문법이다. 시의 문법은 상투적 언어의 문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시를 읽어서 시를 이해하는 것은 가성비 낮은 일이 되는 셈이다. 이전의 시를 읽어도, 현재의 시는 제 언어를 전복하고 다른 언어로 넘어가 버린다. 시는, 독자에게 특히, 축적이 아니라 즉흥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새롭다는 예술의 과제는 그렇게 예술의 딜레마가 된다. 존립하기 위하여 새로워야 하고, 새롭기 위하여 낯설어지는 숙명이 거기 있다.
새롭다는 것은 외롭다는 말과 같다. 신춘문예가 지망생들과 심사위원들을 암만 달뜨게 해도, 매년 첫날 신문지면을 채우는 것 이외 독자에게 아무런 감동을 못 주는 까닭이 새로움을 제1 원리로 삼는 예술관에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전복을 전복하라,는 말이 여기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예술은 세계를 전복한다,는 말을 다시 전복할 필요는 없을까? 예술의 제1 원리가 꼭 새로운 것인지 의심하자. 혹시, 예술의 제1 원리는 감동이다,는 안 될까? 전복한다는 말은 예술가의 의지 측면이고, 감동이다는 말은 독자의 욕구 측면이다. 소수와 다수의 게임에서 아직 소수가 이기는 기행(?)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의문이다. 좀 재미 있으라, 그러면 읽으리라. 시가 전복해야 할 희대의 세계는 이것에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빗질 - 이기인
강아지 얼굴이 부었다
구름의 아이를 낳아서 저녁으로 흘러갔다
버스에서 의자는 내리지 못했다
어디 살든 소식 좀 보내주오 거리의 가방이 흩어졌다
햇빛을 차용증으로 강물을 건넜다
열쇠고리에서 작은 쇳덩이를 풀어냈다
들어갈 수 없는 방을 떠올렸다
바람은 가장(家長)을 박대하였다
머리카락은 눈을 감았다
“이기인 시인이 글쓰기라는 문학 실험에 나선 지는 오래됐다. 알쏭달쏭한 언어 실험 속에서 시인은 세상이 얼마나 알쏭달쏭한지 보여줬는데, 그의 언어는 이제 거의 언어 규범의 전면적 해체에서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기인 시집 『혼자인 걸 못 견디죠』 뒤표지에 실린 쪽글 일부이다. 시집에 붙은 [해설]이 아무것도 해설하지 않는 반면, 그 쪽글은 이기인 시를 읽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기인은 감각과 의미의 의도적 착란(illusion)을 보여줌으로써 규범을 폭로하는 난센시스트이다. 동시에, 의심받지 않는 감각과 의미가 뿌리 깊은 착란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주의자이다.” 심선기 시인이 붙인 그 쪽글에는 이기인을 읽을 때, 언어 실험과 난센시스트, 그리고 사실주의자인 것을 유념하라는 팁이 있다.
인용시 [빗질]은 그런 언어 실험과 난센시스트, 사실주의자의 혼합이 있다. 그 시에는 스토리가 숨어 있을 것 같다. 9행 단출해도, 행과 행은 붙어 있어도, 각 시행들은 일견 연결 고리 없이 의미가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 살든 소식 좀 보내주오’ 라든가, ‘차용증’, ‘들어갈 수 없는 방’ 그리고 ‘가장(家長)’ 등등 문장과 단어들을 가만히 엮어보면, 이 시는 파산한 가장이 집 잃고 식구들을 흩어 놓은 심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강아지 얼굴이 부었다는 것은 강아지조차 울다 얼굴이 부었다는 감정이입 같고, 구름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은 연이은 구름 무늬를 은유할 뿐 아니라 제 아이를 향한 슬픈 심사일 터이고, 버스에서 의자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은 앉을 자리 없는 신세를 대신하는 말인 것 같다. 거리의 가방이 흩어졌다는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환유이다. 열쇠고리에서 작은 쇳덩이를 풀어냈다는 말은 집 잃고 그 열쇠를 풀어 내놓는 사건의 몽타주일 터이다. 바람조차 박대하는 한 가장, 시제 [빗질]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쓸리는, 세파에 휘청이는 그 가장의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
한참 들여다보면, 시에서 스토리가 보이거나, 어떤 정서가 감각되는 것은 시의 힘이다.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기 어려움이 있다. ‘시적 압축미’가 어쩌면 그런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이 그런 것이다. 한참 들여다보면 다 예쁘기도 하다. 그럴 참을성과 그럴 심미안이 독자에게 부족하다. 그렇다고 보면, 시가 옳고 독자는 게으르다. 아니 바쁘다. 독자여, 조금 덜 바쁘시고, 시여, 조금 덜 옳으시라.
(2020.1.27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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