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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1

이순 12,462km – 김경후, 요하네스버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시선 412, 2017.8.7

 

  “문학의 소재가 현실이고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은 따라서 현실에 대한 관심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서술이란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취하는 가장 명백한 형식이다.”

-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 P80

 

  나이를 먹으면 좀더 현명해질 것을 기대한다. 이순(耳順)이랬던가? 공자께서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고 하셨다는데, 나는 예순을 앞두고서 이순은커녕 역순(逆順)이 되는 것 같다. 보고 듣고 판단이 필요한 많은 일들에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렵고, 취해야 할 선택지를 앞에 두고 여전히 망설인다. 매사 최선과 차선, 최악과 차악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 오리무중하다. 최선을 모르고 선택한다는 당혹감은 나이로 육갑을 떨어도 여전하다. 이순? 나는 육십이 보장해주지 않는 많은 일들에 당혹하다.

 

  가령, 약간의 치매와 거동이 불편한 노모가 있다고 하자. 혼자서 준비된 국을 덥히고 밥솥에 밥을 끓여 먹을 정도는 되지만, 밤낮이 헛갈리기도 하고, 자고 일어났을 때 화장실에 가려다 현관문을 여는 일이 간혹 있다. 일 년에 한 번쯤 사고에 가까운 낙상을 당한다. 근일 사고가 있었다. 노모의 안전을 위하여 요양원을 알아본다. 요양원 입소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시설급여라나 장애진단등급을 받아야 비용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없으면 개인부담 요양비가 한달 2백만원에 달한다. 시설급여를 받을 수 있을 때, 가기 싫은 노모를 요양원에 밀어 넣어야 할까, 아직 때가 아니라고 그 입소를 잠시 미뤄야 할까, 선택은 어렵다. 시설급여를 받을 수 없을 때, 노모를 떠안고 살아야 할까, 한달 2백만원씩 비용을 부담할까, 선택도 어렵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도 요양원에 자리가 없는 것을 보면 대개 자식들이 요양원을 선택하는 것 같다. 노모마다 자식마다 사연과 상황은 다를 것이다. 다른 상황의 선택이 나의 선택에 참고가 되기도 어렵다. 거기 최선의 선택이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선택을 하기는 해야 한다.

 

  나이를 암만 먹어도 헛것이라는 당혹감 비슷하게, 이곳까지 왔는데 이곳이 다시 저곳을 가리킬 뿐이라는, 삶의 지향의 당혹감을 말해주는 시 한 편을 아래 꼽아본다.

 

요하네스버그          - 김경후

 

수원화성 앞 표지판엔

요하네스버그까지 12,462킬로미터

어째서

길 건너 통닭집과 점집을 가리키며

방금 튀긴 죽음의 기름 냄새와 죽어갈 것들을 냄새 맡으면서

어째서

오래된 옛 성까지 오래도록 걸었는데 다시 오랫동안

요하네스버그까지 가야 한다고

갈 수 없다고 12,462킬러미터

조개구이 생각이나 하며 조개를 줍다

세계적인 해적 두목이 되라는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난파당해 밀려온 너덜너덜한 나를 발견한 것처럼

어째서

이곳이 아니라고 가리키며 12,462킬로미터

설거지통에서 성당까지

팬티스타킹 구멍에서 돌십자가까지는

아무 의미 없다고 멀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째서

저곳은 멀고 이곳은 저곳을 가리키는 곳일 뿐

이제 또 가라고

이곳에 첫 돌멩이가 굴러오기 전 풀들 스치던 소리

돌벽 가루 속 흩날리는 마음에

어디로 가라고

이곳은 저곳을 가리키는 곳일 뿐

언제나 이곳은 저곳보다 멀었다

어째서

어디에 나는 있어서

이곳이 되는가

요하네스버그

 

  내가 선택의 곤란으로 이순에도 당혹하고 있다면, 김경후(1971-) 시인은 지천명(知天命)에 지향의 곤란으로 당혹하는 것 같다. 지천명나이 50이면 하늘의 뜻을 알겠더라는 그 호기는 공자 같은 인물의 전용(專用)일까, 시인은 이곳에 도착했는데 저곳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망연하다.

 

  요하네스버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지난 2년 가까이 세계를 봉쇄 지경으로 몰아넣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좀 수그러들까 싶을 즈음, 근일 새로운 변종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발원한 그곳이 남아공이다. 그 나라 그 대륙 가장 큰 도시 요하네스버그 - 그 도시를 시인이 경험했을 것 같지는 않다. 수원화성을 둘러보던 도중에 그저 요하네스버그 12,462km’라고 쓰인 표지판을 본다. 가고자 하는 그곳에 도달하였는데, 이곳이 아니고 저곳이라고 가리키는 허망한 거리감 지천명도 이순도 알지 못하는 것, 이해 못하는 것 들은 많기도 많다.

 

  인용시는 김준오식 이론에 따르면 서술시이다. ‘소재에 대한 관심을 취하는 서술시란 '대상에 집중하는 묘사시에 대한 변별이다. 서술시는 소재에 대한 관심이 뚜렷할수록 요해가 쉽다. 이곳과 저곳 사이, 그 거리를 가리키는 ‘12,462킬로미터는 환유적 의미를 품는다. 당혹, 곤궁, 난망무엇을 읽든 그것은 서술시가 환기하는 삶의 진면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난해한 서술시는 따로 있다. 그 부류 역시 소재를 나열하지만, 그런 소재에서 일관성이나 유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들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어의 추상이랄까, 그럴 때 서술시는 언어의 미궁으로 지천명이든 이순이든 독자를 혼란케 한다.

 

(2021.11.2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