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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3

달의 진면목 – 김지녀, 루나틱 구름에 휩싸인 얼굴

시집 『시소의 감정』(민음사, 2012.9.19 초판 3)

 

  내가 김지녀 (1978-) 시집을 처음 읽은 것은 2014년이다. 그 무렵부터 나는 시집을 한 달에 두어 권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양들의 사회학』(문지사, 2014)에서 두 편을 골라 간단한 감상을 여기 블로그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때 그를 제대로 읽었다고 하기는 어렵지 싶다.

 

  이번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시소의 감정』을 찾아 읽었다. 일을 하는 게 그렇듯이 앞에서 뒤로 순서를 따르는 게 대개 수월하지만,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먼저 읽고, 첫 시집을 10년쯤 후 읽는 일은 우연히 좋은 선택이 된 듯싶다. 두 번째 시집이 보다 구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첫 시집을 먼저 읽었다면 그 모호한 언어에 헤매었거나 읽기를 그만두었을 지 모른다. 이제 첫 시집을 읽으면서 아름답게 제 심상을 서술하는 그 언어의 기술에 감탄한다. 먼저 읽었다면 못 보았을 아름다운 언어가 지금 시인의 첫 시집에 찬란하다. 두 번째를 먼저 읽어서 가까워졌고, 첫 번째를 나중에 읽어서 감탄하게 된 것은 그간 내가 지음(知音)을 몇 가락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이 언어의 높이를 조절한 덕분이겠다. 첫 시집에서 한껏 제 언어의 성량을 높였고, 두 번째 시집에 보다 부드럽게 노래했던 것 아니었을까 싶다.

 

  첫 시집 『시소의 감정』이 한국도서관 선정 ‘2010년 우수문학도서였다고 한다. 어떤 상이든 충분히 받을 만하다. 당시 등단한 지 겨우 2년된 시인의 첫 시집에는 그럴 만한 기재가 풍부하다. 너무 잘 써서 오히려 약점(?)을 갖는 시집이지 않을까 모르겠다. 비슷한 제재의 다른 시인의 시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잘 쓴 시가 어려운 시가 되는 그 약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런 시 2편을 여기 놓아본다.

 

루나틱 구름에 휩싸인 얼굴          - 김지녀

 

  창문 없는 방에 누워 있으면 어느 순간 이마에 고인 미열이 참 따뜻하다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잠든 엄마 뱃속

  여기는 얇은 주름이 잡힌 호수의 밑바닥

  손톱으로 긁어 보면

  이곳에 살다 간 사람들 살냄새가 바스스 일어나 말을 건네고

  기침이 많은 밤을 나는 소름 돋는 눈빛으로 느낀다

  낯선 구름을 데리고 온 계절 앞에서

  내 얼굴은 곰팡이 슬어 가는 벽이 되었다가 깊은 우물이 되었다가 하얗고 동그란 달*이 되었다가

  다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끌어 담지 못하는 그물

  나는 한 달에 한 번 사라지는 그늘

  어제는 이곳에 나를 뚝 떼어 놓은 배꼽이 간지러워 바닥을 뒹굴거리다

  목이 말랐고

  목매달고 싶었다

  그러나 식물처럼 가만히

  내 안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때

  몇 겹으로 덧바른 꽃무늬 벽지에서 시간의 뒷모습 냄새가 났다

  가끔 얼굴을 씻고 저녁을 만나도

  저기 저 북극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차갑고 무거운 글자들이 떠 다닐 것만 같고 그 편지의 두 번째 혹은 네 번째 줄에는

  누군가 흘리고 간 웃음이 얼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오늘은 내 뒷모습이 보고 싶다,고 쓴다

  식어 가는 이마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병에

  지구의 기울기를 느끼는 이 순간에

  푸른 나뭇가지 끝에 걸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나는 한 달에 한 번 추억되는 구름

 

      *문 페이스(Moon face) :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증상

 

  인용시는 구조가 복잡하고, 비유는 서로 얽혀 있다. 그 시를 1) 창문 없는느낀다, 2) 낯선 구름을싶었다, 3) 그러나쓴다, 4) 식어 가는구름,처럼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3)에서 대상은 방과 그 방의 벽지이다. 그것들은 물의 이미지와 관념을 차용한 물의 은유이다. 고인 미열, 엄마 뱃속, 호수의 밑바닥, 흐르는 물소리, 떠다닐 것, 얼어 있을지 등등 방과 그 벽지는 물과 관련 있는 속성으로 서술되고 있다. 고이고 흐르고 어는 물의 은유. 2)4)에서 그 방에 누워 있는 화자가 제 얼굴의 이미지와 상념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미지의 중심은 달이다. 하얗고 동그란 달, 한 달에 한 번 사라지는 그늘, 오늘은 내 뒷모습이 보고 싶다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등등 얼굴은 정체성을 특정하기 어려운 달과 관련 있는 속성을 차용한 달의 은유이다. 특정할 수 있으나 어떤 특정도 전부가 아닌 달의 은유. 방과 나, 물과 달은 속성에서 유사하며, 또한 상호 은유이다.

 

  규정할 수 없는 주체는 모호하다. 가능태와 현실태를 오고 가는 게 아니라, 그 오고 가는 사이 규정되었다가 해체되었다가 다시 규정되는 변증법적 진보의 계단을 밟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능태로써 제 얼굴을 형상할 수는 없다. 형상한다고 해도, 그 형상은 고이고 흐르고 어는 물처럼, 차고 기우는 달처럼 전체의 모습이 되지 않는다. 인용시의 약점은 여기 기반한다. 특정할 수 없는 제 얼굴을 특정하면서 동시에 하지 않으려는, 말하자면 의도의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셈이다.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을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2009.2.27 초판 12)

 

  김경주(1976-) 시의 화자도 비슷한 처지의 방에 있다. 새로 이사한 방에서 화자는 제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방의 창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와 자신도 오래전 어떤 방 주위를 서성일지 모른다는 동질감을 나눈다. 누군가 그렇듯이, 자신도 자신의 과거를 서성인다.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제 자신을 분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김경주 시는 비유의 모호함 없이 직관적으로 아름답게 읽힌다.

 

  김지녀 시의 방은 물과 달이 은유 개념으로 엮어 있다. 문장 단위뿐 아니라 시 단위에서 크게 은유 개념이 활용되는 것이다. 김경주 시인의 방은 시 단위의 <큰 은유> 없이 문장 단위의 <작은 은유>가 수사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는 소리가 될 때, 그 문장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런 은유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기 쉽다.

 

  어떤 시가 더 좋으냐 묻는다면 우문이다. 보름달이 뜨면 보름달을 보고, 초생달이 뜨면 초생달을 보고, 달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시인도 알고 독자도 안다. 시인은 언어에서 잘났고, 독자는 시에서 동등하다. 시가 곧 삶이기 때문이다. 너무 복잡한 삶이 곤란이듯이 시 또한 그러하다.

 

(2023.8.7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