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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5

시가 안 되는 조건 한 가지 – 최승호, 태양의 납골묘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R16, 2018.7.20)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
-    하우저 지음/백낙청 염무웅 옮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P107
 
  김인환 교수(1946-)는 『비평의 원리』(나남신서, 2007)에서 김동명(1900-1968)을 평가하면서 “전투적 정열의 결여로 인하여 김동명의 시는 늘 소품에 그치고 만다”라고 한 바 있다. 작고한 시인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결산이더라도, 예술가에게 전투적 정렬이 결여되었다는 말은 예술성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못지않는 악평이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결여 말고, 전투적 정열을 상실하는 경우 또한 있다. 흔히 나이 먹으면서 희망과 야심을 잃기 쉽다. 남자가 늙는 때가 나이 먹은 어느 때가 아니라 스스로 늙었다고 인식하는 그때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늙었다고 인식하는 그때라는 게 바로 삶의 전투적 정렬을 상실하는 때이고, 희망과 야심이 시드는 때이고, 남자가 늙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고, 영생은 못하겠지만 팔딱하게 살 방법이 여기 있지 싶다. 죽을 때까지 전투적 정렬을 잃지 말고, 희망과 야심을 간직하라. 덧붙이자면, 남자가 늙는 때가 따로 있고, 여자가 늙기 시작하는 때가 서른 이후라는 농담은 성차별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늙는 때 늙는다.
 
태양의 납골묘          - 최승호
 
둥근 지붕뿐만 아니라
납골당 내부의 유골 보관함을
철제도 석재도 아닌
투명한 유리로 바꿀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유골 보관함 속의
뚜껑 덮은 유골단지들도 모두
투명한 유리 항아리로 바꿀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태양의 납골묘 안으로 들어섰을 때
번쩍거리는 유리들의 복도 사이에서
걸림 없는 맑은 시선으로 재를 들여다보며
 
적어도 건조된 재에는 더 이상 불길한 욕망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최승호 시인(1954-)은 1977년 등단하여 다수의 시집을 출간한 노장이다. ‘세속 도시의 내면을 꼼꼼하게 살피고 그 의미를 복원하는 시적 탐색의 길을 걸어왔다.’ (장석주) 앞선 시집을 읽어본 바 없어서 따로 할 말은 없고, 이번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를  읽으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번호에 ‘R’이 붙은 것은 재출판을 의미한다고 한다. “20세기 후반에 출판되었거나 다양한 사연으로 절판되었거나 출판사가 폐문함으로써 독자에게로 가는 통로를 차단당한 시집들” (문지사 기획의말)의 ‘복간reissue’이고 ‘반복répétition’이며 ‘부활résurrection’을 가능케 하겠다는 출판사 포부가 그 ‘R’에 들어 있는 거 같다.
 
  그간 ‘R’ 시집을 몇 권 읽어 보았다. 좋은 것 나쁜 것, 반가운 것 실망스러운 것, 살아있는 것 죽은 것 들이 섞여 있지 싶다. 독자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이해 안 되는 시선이 최승호의 그 시집이다. 시인의 대표 시집도 아니고, 기념할 시집도 아니고, 현재성을 태생이 지니지 못하는 시집을 왜 복간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옛것의 귀환이라는 사건을 때마다 일으키겠다’는 문지사 포부는 어쩌다 실족하여 스스로 얼굴을 뭉개는 것 같다. 최승호의 그 시집은 2003년 출간을 복간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집을 통틀어 읽을 만한 시를 나는 못 찾았다. 2003년 출간이라면 시인 나이 50이 안 되었을 때 낸 시집이다. 40대는 중년이고 왕성한 사회적 시기이다. 시인이라고 안 늙을 수 없더라도 현대인으로 40대에 지레 늙은 시집이 왜 복간reissue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태생이 늙었어도 죽지 않았으니 부활résurrection로 이제 죽음을 추인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왜 주제넘게 혹평하느냐고? [태양의 납골묘]는 그 시집에서 고른 그나마 시적 발아가 희미하게 보이는 시다. 시가 시인 조건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시가 시가 안 되는 조건 역시 마찬가지 같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설명할 때, 그것은 시가 아니다.
 
(2025.3.1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