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10.26)
시인은 자그마한 에피소드로 시를 꾸린다. 새벽에 세탁기를 돌리는 일이다. 다세대주택의 허술할 수 있는 건축물은 층간 소음에 보다 취약할지 모른다. 세탁기는 그곳에서 유난히 몸을 떨고 모터 소리를 키운다. 난감하지만, 시인은 달리 방법이 없다. 곤한 새벽 얼굴 모르는 이웃을 깨울 수 있는, 층간 소음으로 가끔 칼부림까지 부를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왜 그러고 사냐고?
[1인 가족] - 안현미
새벽 5시, 세탁기를 돌린다 특별시의 시민으로서 세탁기를 돌린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는 8가구 다세대주택의 새벽을 돌린다 필시 누군가의 단잠을 깨울 것이 분명하지만 특별시의 시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세탁기를 돌리고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정신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정신없이도 살아남아야 한다
새벽 5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돌린다 얼굴도 모르는 강박을 돌려야 한다 층간소음 다툼으로 살해당할 각오를 하면서도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돌려야 한다 특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인은 억척 여성이었을까? 네 살 아들을 업고(?) 다니며 시를 학습했고 (서울산업대의 ‘시 공부하는 모임’에서 시를 공부했다나), 등단 후에도 회사 등을 다니며 가족 생계를 책임졌는가 보다. 시집 뒤의 발문에서 소설가 한창훈은 “시인은 자기 인생을 유골함처럼 시집에다 담아놓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거기서 ‘시는 일인칭 자기 독백’이라는 낡은 이론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시인의 고단한 삶이 느껴져야 한다. 시인은 정신없이 살고 있는가 보다.
“정신없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구절은 그래서 눈물겹기만 한 게 아니라 비장하다. “살해당할 각오”까지를 해야 한다면, 딱히 그렇다. 서울특별시 시민들은 그렇게 “특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벽 5시에라도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그 비장함에 왜 자꾸 웃음이 나오나 모르겠다. 나도 얼마 전 그 ‘특별한’ 시민이 되었다. 그럼, 나도 새벽 5시에 세탁기를 돌려야 하나?
(2015.6.10 진후영)
'시시한 이야기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의 끝에 걸리는 무게 – 문태준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와 [호면] (0) | 2015.06.18 |
---|---|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높이 – 문태준 [유자] (1) | 2015.06.13 |
사랑도 수리된다 – 안현미 [화면조정시간] (0) | 2015.06.08 |
뻐꾸기는 왜 우는가 – 안현미 [여름 산] (0) | 2015.06.04 |
남겨진 자는 기쁘다, 다 가져가지 – 손택수 [벚꽃 개화예상도를 보며] (0) | 201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