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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5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높이 – 문태준 [유자]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4.20)

1.
  한 시집을 처음 펼치는 것은 마치 블라인드 미팅을 하는 순간 같다.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 어떤 성격을 보일까 하는 호기심,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 모든 시집이 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얼굴을 대면한다는 설렘과 당혹의 그 혼란한 순간이 좋다. 

  문태준(1970- )의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읽는 일도 그와 같았지만, 맨 처음의 그 순간은 지극히 평이한 – 아니, 고루한 얼굴처럼 보였다. 잠깐 사이 61편의 시를 휘둘러보았다. 70년생, 94년 등단했으면, 시인으로서 중견이다. 시인으로는 늙었나? 늙은 시를 읽는 것은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것처럼 밋밋한데, 다시 읽을 가치가 있을까? 그러다가 시집 뒤의 해설을 읽어 보았다. 거기서 표제시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다시 보았다. 최현식 평론가는 그 시를 딱 집어 “임종을 지키는 자리”라고 못 박는다. 그냥 책장을 넘겨보다가 내가 못 본 곳을 그는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은 임종에 닿은 ‘당신’- 어머니이며, 그 시는 ‘마지막 얼굴’을 응시는 ‘정중한 애도’라고 해설한다.

  시는 천천히 읽어야 한다. 휘둘러보려다가는 아무 것도 못 보기 쉽다. 내가 그 시 한 편을 놓친 정도가 아니라, 문태준 시집에서 아무 것도 못 본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천천히 다시 읽었을 때, 거기에도 찬란한 세계가 웅크리고 있었다.

2.
  그 시집에는 사물이나 풍경을 느리게 관찰하는 시들이 모였다. 그러면서 대개 짧다. 대상을 짧게 서술하려면 시인은 얼마나 갑갑하게 언어를 제 속으로 눌러 담았을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끝 시행에서 시는 한 문장으로 제 속을 다 토해놓는 경우가 많다. 그 지점에서 시는 특히 찬란하다.

  또 하나, 그 시집에는 짧은 시를 지탱하기 위해 은유 문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은유는 두 단어의 교환과 대체가 아니라 문장 안에서 두 개념의 연결, 결합, 상호작용이다.” (김애령, 은유의 도서관, 75) 은유 이론의 시조로 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명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 것 같다. 그의 은유는 두 단어의 의미의 ‘전이(epiphora)’이다. 그러나 은유는 명사 간 ‘전이’뿐 아니라, 서술어의 ‘대체’ 등으로 확대하는 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은유 문법인 것 같다.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끄름이앉는다” (이상 시, [아침])

  이 문장에서 ‘캄캄한 공기’는 ‘폐벽에 끄름”으로 은유된다고 할 수 있다. 명사 은유는 그러하지만, 그것보다 캄캄한 공기를 ‘마신다’는 행위를 폐에 ‘끄름이 앉는다’는 서술어의 ‘대체’로 읽는 것이 훨씬 생생하며 생경한 독법이 된다고 본다. 서술 은유는 이를 테면 은유 영역의 확장이지만, 시적 언술이 아름다운 이유를 규명하는 좋은 도구가 아닐까 싶다.

  그 시집에는 사물이나 풍경의 서술에서 더 나아가 사물의 눈으로 세계를 서술해 보이기도 한다. 대개의 시들이 관찰자 ‘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서술하다가, 몇몇 시편에 이르면 아예 ‘사물시점으로 서술 주체를 뒤바꾸기도 한다. 그렇게 사물의 물성 속으로 아예 들어앉았을 때, 시는 인간사를 새로운 앵글로 포착하는 감각을 보여 준다.

3.
  시집은 4부로 나뉘었지만, 그런 구분에 딱히 기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제1부의 한 편을 꼽아본다.

[유자]          - 문태준

노오란 유자가 달려 있네
내일의 예고가 이러했으면

낮 열두시의 혈색
낮 열두시의 과육
이상한 달콤함
낮 열두시의 잠

이 한알의
영혼,
영혼의
캐스터네츠

나가서 만져보리라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에 달린
노오란 유자를

  노란 유자 열매는 ‘내일의 예고’이며, ‘낮 열두 시의 혈색/과육/잠’이다. 그것은 ‘이상한 달콤함’이다. 이들은 모두 명사 은유이다. 아마도 유자의 달콤한 향을 은유하는 것 같다. 유자는 단순히 ‘한 알의 영혼’이 아니라, 그 경쾌한 비트의 ‘영혼의 캐스터네츠’이다. 캐스터네츠로 박자를 맞추는 춤이 플라멩고던가? 아마도 유자의 강렬한 맛을 은유하는 것 같다.

  정작 이 시의 가장 높은 성취는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에 달린 노오란 유자’에 있다.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 유자가 향에서 달콤하고 맛에서 강렬한 만큼, 그것의 성취는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닌가.

  이 시는 이 구절 하나로 아름답다. 이 결구는 시가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높이를 보여준다.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 – 우리가 거기에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5.6.13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