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4.10)
서정도 낡은 것이다. 현대시의 영역을 좁혀 서정시라고 부르는 건 시가 스스로를 가두는 자괴감일 수 있다. 세상을 사는데 정서란 대개 걸리적거리는 무엇이다. 시가 인간 감정의 미묘함을 건드리고 은유하고 환기하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이란 게 따지고 보면 몇 가지에 수렴할 정도로 그 속은 좁다. 그런데 현대시는 모두 서정시라고 한다. 그 갑갑한 세계를 유유히 헤엄치는 시인, 그가 박소란이다.
박소란 (1981-) 시인의 첫 시집이다. 등단 6년만에 그간 모은 시들 50여편을 펼쳐 놓았다. 그 시집에서 모든 시들은 매우 고르다. 호흡에서, 품질에서, 지향에서 그 시들은 상향 평준화되어 있는, 시를 읽는 독자들 – 있기는 하겠지 – 기대를 넘는 문장과 정서를 펼쳐 놓는다. 그런데, 잘 읽어보아야 그가 왜 좋은 시인인지, 그의 시가 서정이면서 서정 이상인지 알 수 있다. 서정성의 좁은 세계가 출구를 하나 찾은 것 같다. 그 출구는 허술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강력한 것이다.
그의 시들은 더러 운문 투이고 대개 산문 투지만, 특유의 리듬이 있다. 산문의 리듬은 어쩌면 호흡이다. 음보(音步)라고 하기에는 보폭이 자주 어긋나고, 잘 다듬은 문장이기에 그러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마뜩잖고, 소위 현대시의 ‘내재율’ –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주장인가 – 그걸 누가 좀 못 밝혀주나? 그의 시들은 아무튼 일정하게 어떤 호흡을 이끌어 준다.
그의 시집에는 하고 많은 세상의 소품들이 있다. 작은 것들로는 비닐봉지, 십원짜리, 베개, 돌멩이, 칼, 비누 등등, 먹는 것들로는 감, 뚝배기(삼계탕), 참외, 만두, 설탕, 김밥, 그리고 메리(개), 무당, 오줌소리, 눈곱, 바구미 등등, 시마다 시를 이끄는 구체적 모티프들이 있다. 그것들은 일상 속에 언제나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로부터 시인이 찾아내는 일상성(日常性)은 말 그대로 ‘인간 본연’의 정서이다. 그의 일상성에는, 그 정서에는 가족의 기억과 무엇보다 어떤 사회적 사건이 깔려있다. 그 둘은 시인에게 같은 것이다. 시인은 인간 삶의 우환을, 부조리를 슬픔과 체념의 노래로 부르고 있지만, 노래를 듣는 끝에 희망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희망이고, 동시에 서정의 희망일 수도 있다.
[노인] - 박소란
집 앞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밥상
칠이 벗겨진 흉곽 위로 굵은 빗방울 떨어진다
달그락대는 비의 수저 소리에 나는 괜스레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채 삼키지 못한 저녁이라도 있는 건지
한평생 밥만 먹다
고스란히 세월을 물린 고집 센 노인네처럼
뒤늦게 병상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도 없으니, 군기침하며 돌아눕는 뒤통수처럼
밥상은
언제 벌써 이가 몽창 빠진 채로 쓰게 웃고
주린 낯으로 종종거리며 곁을 지나는 내게
부러 더 세게 힘을 주어 뱃가죽을 틀어쥐는 나약한 손에게
신수를 훤히 꿰뚫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백수(白首)의 점쟁이처럼
밥상은 말한다 낮고 너른 음성으로
흠씬 젖은 걸음을 붙든다
그만 이리 와 한술 뜨시게
그래 봐야 결국엔 모두 낡고 만다네
이 시를 읽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리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음보이론의 약점은, 3음보나 4음보와 같은 정형성이 필요하지만 그게 현대시의 작은 변주에도 막힌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또, 낭독의 무게를 가리는 음소이론은 너무 복잡할 뿐 아예 정형성을 세우기조차 어려운 것 같다. 어찌되었든, 그의 시에는 어떤 리듬 – 고른 호흡이 있는 게 분명하다.
시인이 사는 동네가 용산구 한강로 근처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 집 앞 담벼락에 버려진 밥상이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시는 시작된다. 요즘이야 식탁을 많이 쓰고, 밥상을 사용하는 환경이란 게 가난하거나 늙었거나 할 가능성이 높다. 그 버려진 밥상은, 길거리에 버려진 것들이 그렇듯이, “칠이 벗겨진 흉곽”과 “이가 몽창 빠진” 퇴물이다. 그 밥상은 시인에게 “고스란히 세월을 물린 고집 센 노인네”를 떠올리게 한다. 그 노인네는, 병상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도 없으니, 군기침하며 돌아눕는 뒤통수”를 보이는, 어쩌면 “밤낮 부레끓는 숨과 다투던 폐암 말기의 어머니”(48)일 수도 있다. 그 밥상이 “이가 몽창 빠진 채로 쓰게 웃고” 있는 표정은 너무나 슬픈 웃음이다. 언제나 가난하였는지 “주린 낯으로 종종거리며 곁을 지나는” 시인에게 밥상이 “낮고 너른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건넨다.
그만 이리 와 한술 뜨시게
그래 봐야 결국엔 모두 낡고 만다네
그 말은 어머니 같은 노인네가 하는 말투지만, 그 이상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시인의 그 동네 용산은 근래 역사의 한 현장이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92) 그 용산은 수년 전 용산개발 문제로 혼란하던 그 용산이고, 급기야 참사라는 참담함까지 경험한 그곳이다. 이 시집에는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92) 라고 쓸쓸해 하는 [용산을 추억함]이 있고, 그와 연관된 몇 편의 시들이 또한 있다.
서정성의 한쪽 출구가 여기 있는 것 같다. 서정이 단지 개인 감정에 침잠할 때, 그것은 한 세기는커녕 몇 년을 버티기도 어려울 수 있다. 그 서정성이 사회성에 닿을 때, 즉 서정이 사회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정서일 때, 그것은 생동하는 기운이 된다. 비록, 시인이 지금 슬픈 듯 체념한 듯 노래하더라도, 그의 노래는 단단한 땅 위에 울리는 노래이다. 그럴 때, “그래 봐야 결국에 모두 낡고 만다네”는 그저 개인적 체념을 넘어선다.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는 익명의 새들’을 다 내쫓아도 마지막까지 남는 자들은 그 ‘익명의 새들’일 것이다.
박소란 시인의 서정이 그저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서정의 출구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참여하는 서정이랄까,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닐지라도 더 넓은 영역으로 가는 문인 것은 틀림없다.
(2015.7.24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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