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마치』 (문학과지성사, 2014.4.30)
이수명의 다름은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모두 그러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의 시보다 비평에 오히려 더 호감이 간다. 그것은 아직 통상적인 시에 친숙한 내 수준과 더 관련이 있겠지만, 몇 편 읽은 그의 비평의 탁월함 또한 그 이유가 된다. 내가 그의 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탁월함을 그의 비평에서는 쉽게 읽는다면, 딱히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상상보다는 논리에 더 기우는 탓일 수 있지만, 또한 이수명의 시와 비평에 그만큼 감동의 낙차가 있다. 비평과 다르게 이수명의 시에서 감동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시인이 그걸 의도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의 시론집 – 사실은 비평집 『횡단』(문예중앙, 2011.5.25)에서 한 사례를 보자.
“2000년대 등장한 미래파 시인들에게서 나타난 가장 가시적인 현상은 이 주체의 변화였다…무엇보다 눈에 띄는 현상은 주체가 성숙한 어른이 아니라 미성년들이라는 것이다.” (111) 김언, 황병승, 김행숙, 김민정, 이민하, 장석원 등등 2000년대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들의 새로운 기조에 대하여 이수명은 단숨에 그 핵심을 집어낸다. 시적 주체의 변화가 그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미래파가 기존 세계의 구도를 뒤집는데 주체로써 미성년들을 내세웠던 이유는, 미성년들이 미분화와 혼돈이라는 특성에 힘입어 질서를 공략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제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허위이다.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에 불과하다.” (116) 그 질서의 허위를 깨는데 질서에 아직 편입하지 않은 미성년들이 제격이었다는 그의 분석은 매우 합당해 보인다.
그러면서, 이수명은 미래파가 내세운 주체의 한계를 이렇게 질타한다. 그는 미성년들이 싸워야 할 어른의 세계가 확실히 있는 것인가 묻는다. 그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 질서를 승인하고 한편에 서는 셈이다. 따로 없다고 여긴다면, 싸워야 할 세계도 없게 된다. 궤변 같지만, 미래파가 내세운 주체의 싸움의 모순이 여기 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장에는 비주류가 있지만, 삶에는 비주류가 없다. 인생에서는 모두가 주류이다. 그리고 모두가 비주류이다.” (118) 이수명은, 인간은 주류 비주류를 넘어서 그 자체로 파괴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수명은 미래파의 주체 문제를 이렇게 결론한다. “미래파 시에서 주체의 공급처를 변경한 결과는 세계의 축소이다.” (119) 또한, 주류와 비주류 문제 혹은 미성년들의 반항은 이미 영화나 만화에서 낡은 소재이다. “이들 문학의 새로움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 적어도 소재의 측면에서는 – 다른 장르를 통해서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는 당혹감” (120)을 느낀다고 질타한다.
이만하면 이수명의 비평은, 김현의 표현을 빌리면, ‘시대의 핵’을 잡아내는 셈이다. 그의 비평은 설득력이 크다.
[거의 사실적인] - 이수명
생기를 얻었다. 거리에서
거리는 저절로 튀어나와 있고
무작정 뛰어다니는 아이들
나를 넘어뜨리고
거의 합리적인 새는
텅 비어 있다
거의 정면을 향한 듯한 나의 자세는
고스란히 공간적인 것이다.
쨈을 가득 넣은 빵을 먹으며 난간 위에 앉아 저녁을 보내곤 한다. 저녁을 들고 날아가거나 난간을 들고 날아가거나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들어오라
흰건반과 검은건반들이여
비어 있는 건반들이여
거의 위대한 안이함을 노래하자
건반들은 움직이고
음들은 사이가 나쁘다.
듣지 않고 대답하지 않고
어떻게 음들은 항상 되살아나는 걸까
거의 사실적인
명랑함들이 앞을 다투어 늘어나는 걸까
이 시를 단순하게 읽어보자. 화자는 저녁 난간에 앉아 빵을 먹으며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마도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가 보다. 연주자가 서툴렀는지 ‘음들은 사이가 나쁘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이루어 ‘어떻게 음들은 항상 되살아’난다. 이 시는 명랑한 어느 저녁 풍경의 이미지, 그뿐이다.
이수명식 언술의 트릭 한 가지가 있다. ‘거의 합리적인 새는 텅 비어 있다.’ 여기서 새를 새(bird)로 읽으면 당황스럽다. 그것은 모양새(views) 또는 사이(space 또는 time)일 수 있다. 기표에 기의를 한 가지로 한정하지 않는 게 이수명식 시어인 듯싶다. 그 새를 이 새(views, space 또는 time)로 읽으면, 그 다음 언술 ‘텅 비어 있다’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틀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 『횡단』에서 이수명의 단상(斷想)들 중 몇 가지를 빌려보자.
“시는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23) 전혀 흡족할 수 없다. 이 시의 이해를 도울 단서는 여기 없다.
“사물이 시보다 먼저여야 하고, 시가 시인보다 먼저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 시를 주도하고, 시가 시인을 주도하여야 한다. 시인은 이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다. 시인이 앞설수록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에 가까워진다.” (27) 아직 흡족하지 않다. 시가 재미냐 교훈이냐는 의도를 거부하는 것까지는 알겠지만, 이 시에 대한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
“시는 동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질감을 위해서 존재한다. 시는 지속적으로 동류화되는 우리 삶에 날아드는 이물질이다.” (74) 이 말은 꽤 통쾌한 아포리즘이다. ‘시는 우리 삶에 날아드는 이물질이다’라는 이수명 시의 지향이 돌멩이처럼 나를 향하는 것 같다. 그 돌에 맞아도 재수없게 죽지는 않겠지만, 아프다. 맞아서 아프고, 맞아도 여전히 갑갑해서 더 아프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15.8.18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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