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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5

시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 최정례 [한짝]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2015.2.10)

  최정례 시인의 근간 시집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시란 무엇일까? 이 말은, 시가 형식에서 갖춰야 할 것과 내용에서 품어야 할 것을 함께 질문한다. 시의 형식을 논하려면 한 권의 시론(詩論)도 모자라겠지만, 그 핵심은 시의 언어이다. 시의 언어란 선어(選語) 수준을 넘어 의미를 향해 구조화된 문장을 말한다. 즉, 시의 형식이란 문장의 기술(技術)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시의 내용을 논하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 핵심은 문장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이든 주제에 집중하겠지만, 시의 문장은 초점을 지향한다. 시가 다른 점은, 문장이 품는 대상을 소실점으로 급격히 몰아넣는 데 있다. 그때 내용은 형체가 해체되고 압축되어, 어렴풋하게 의미가 암시된다.

  “산문이 ‘축적의 원리’에 의한 설명이지만, 시는 ‘압축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을 그 본질로 한다” (김준오, 시론, 47)

  그의 이번 시집은 대개 산문시들이다. 행갈이를 한 몇 개 운문 형식의 시들이 있기는 해도, 그것들 역시 내용에서는 다른 산문시와 거반 같다. 이번 시집은 산문시집이다. 산문 형식의 시를 쓰는 시인들은 많다. 그간 나열한 시인들 중에서, 가령 정진규(1939-) 시인의 시집 『껍질』은 두 편을 제외하고 모두 산문 형식이고, 어떤 시인이든 시집에 몇 편에서 다수를 산문 형식으로 보여준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최정례 시집은 행갈이를 하지 않은 시로써 산문이 아니라, 산문으로 쓰여진 시집이다.

  형식 면에서, 그의 산문에는 좋은 시들에서 찾을 수 있는 수사적 기교가 없다. (수사적 기교가 없는 글은 없다. 적은 것은 없는 것이다.) 대상을 묘사하기 보다 서술하는 문장이 주류이다. 몇 가지 대상을 나열(散文)하고 거기서 초점을 만들어 낸다. 그의 산문이 시가 되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그것 - 초점에 집중하는 데 있다. 그 시집은 시의 형식을 버리고 다만 내용으로 버티는 산문이다.

  최정례 시인은 산문으로 시를 쓴다. 그것으로 시를 이루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읽어 훌륭할 때 좋은 시가 태어난다는 그 지점에 시인의 곤란이 있다. 시인은 새롭고 싶지만, 독자는 좋은 시를 찾는다.

  그의 산문시를 읽어보자.

[한짝]          - 최정례

  장갑 한짝을 잃어버렸다. 용산역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느라 장갑을 벗었었다. 커피를 주문하느라 카드를 꺼냈었다. 개찰구로 나가기 전 십오분간 서성이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장갑이 한짝뿐이라는 걸 알았다.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가방과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눈앞에서 간판들, 창문들, 지붕들, 헐벗은 가로수들이 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또 사면 돼, 무심해지려고 애썼다. 역 구내를 흘러다닐 커피 냄새, 오가는 사람들, 역사 밖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날씨가 차가왔다. 장갑은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이다. 손목 끝에 밍크털 장식이 붙어 있었다. 밍크털이 아니라 펭귄털인지도 모른다. 손목 부분을 바닥으로 세워놓으면 뒤뚱거리다 쓰러졌다. 전날밤 TV에서 본 펭귄 같았다.
  펭귄이라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펭귄은 남극에서 산다. 얼음 위에 서서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고 하체의 체온으로 알을 덥힌다. 얼음 바다를 마주 바라보며 먹을 것을 구해 돌아올 짝을 기다린다. 멀리서 뒤뚱뒤뚱, 날개였던 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짝을, 목구멍에서 먹이를 토해 부화한 새끼의 입속에 넣어줄 짝을 기다린다. 얼음 설원에 눈보라가 친다.
  장갑은 한짝뿐이라 누가 주웠다 해도, 다시 버려질 것이다. 구석에서 더 구석으로 치워질 것이다. 장갑은 신경도 뇌도 없으니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쓰레기통에서 커피 찌꺼기, 쭈그러진 종이컵, 비닐봉지와 섞인다 해도 기분 같은 것은 없다. 차갑고 더러운 곳으로 휩쓸려간다 해도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날은 바다로 간 펭귄도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바닷물 위로 붉은 피가 피어올랐는데,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바다사자들은 언제든 펭귄을 공격하니까. 부화하려던 새끼는 얼어버린 돌덩이가 되어 나뒹군다. 한짝은 얼음 바다를 계속 바라보고 서 있다. 한짝은 느낌도 생각도 대책도 없다. 또 사면 돼, 그 생각에만 매달렸다.

  이 시에서 삶의 어떤 운명을 읽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기차를 타는 와중에 장갑을 한 짝 잃어버린 에피소드가 있다. 남극의 펭귄 한 쌍이 알을 품고, 그중 한 짝이 바다로 식사를 나갔다가 바다사자에 먹혀 잠깐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는 사소한 확률은 다른 에피소드이다. 그로 인하여 펭귄알은 얼어버린 돌덩이가 되고 만다. 장갑 한 짝을 잃은 우연과 펭귄 한 짝이 목숨을 잃는 사건은 무관한 것이지만, 오버랩된다. 장갑 한 짝을 잃은 사소함은 펭귄 한 짝의, 한 쌍의, 그 품었던 알의 운명만큼 점점 더 무거워진다. 펭귄의 커다란 무리에게 한 마리의 비극은 사소한 감소지만, 그 한 짝에게 한 쌍과 알에게 그야말로 목숨이 달린 운명이다. 나는 손에 남은 한 짝 장갑을 쥐고또 사면 돼라고 되뇐다. 그 자기위안이 내 삶의 소소함을, 그 하찮음을 다 털어낼 수 있을까. 다만 그런 합리화로 내가 삶을, 그 운명의 가벼움을 버티는지 모른다.

  또한, 나처럼 시란 무엇일까 생각하는 것 역시 독자로서 자유이다. 이게 산문이냐 시냐, 그 경계가 흐릿한 시를 읽으면서 시는 무엇이냐 헛갈린다.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덧없는 것처럼, 시가 무엇이냐는 사실 질문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 그것은 정의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가치로써 품어야 할 과정이다. 가다가 가다가 결국 닿을 수 없는 목적이다. 그 과정에 변덕이 좀 있더라도 과정을 밟아가는 한, 그 질문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산문도 시고 시도 시다. 어쩌면 시는 모든 것이다. 다만, 시인의 산문이 좋은 시냐는 독자의 기호일 따름이다.

(2015.9.4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