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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5

시인은 온전한 신앙인이기 어렵다 – 전동균 [우리처럼 낯선]

시집 『우리처럼 낯선』 (창비, 2014.6.20)

  시인이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는 신앙인일까, 시인일까? 시인이 가톨릭 신자라면, 그는 믿음을 우선할까, 시를 우선할까? 시시껄렁한 질문을 진지하게 묻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 이 말은 불교적 파격이지만, 그 의미는 별거 아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구를 좀 세게 말한 따름이다. 자력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부처든 부모든 그들의 세계를 다 지워야 자신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비유이다. 말하자면, 살부(殺父)는 자기에 대한 변혁 의지이다. 부(父)의 세계를 넘어설 때에 자(子)의 세계가 새롭게 열린다. 이것은 불교적 구원의 길이다.

  종교는 내세를 지향하지만 시인은 실존을 고민한다. 이 상충을 극복할 방법이 있을까? 더하여, 시인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의 구원은 불교와 방향이 다르다. 하느님과 그 독자(獨子)와 그 전능에 대한 믿음, 무엇 하나 흔들리면 아마도 구원받기 어렵다. 시인은 내세를 기약하든지 시를 붙들고 실존을 번민하든지 한쪽에 서야 한다.

[우리처럼 낯선]          - 전동균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 돌들은 왜 지느러미가 없고 새들이 사라지는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는 거죠? 저토록 빠른 치타는 왜 제 몸의 얼룩무늬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매머드라 불리던 왕들은, 맨 처음 씨앗을 뿌리던 손은 어디로 갔나요?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우연히, 누가 부르는 듯해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그래서 잠들 때마다 거미줄이 얼굴을 뒤덮고 아침의 머리카락엔 불들이 흘러내리는 걸까요?

  한 처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웃게 해주세요 지금 구르고 있는 공은 계속 굴러가게 하고 지금 먹고 있는 라면은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꽃밭의 꽃들 앞에 앉아 있게 해주세요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은

  이 시는 시집의 표제시이다. 2부에 실린 시들은 신앙 고백에 많이 경도되어 있는 것 같고, 이 시는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시라고, 나는 본다. 이 시를 표제에 얹은 것으로 미루어 시인은 스스로 신앙인임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가 품은 번민은 오히려 여기서 더욱 깊다.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라는 질문과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냐는 투정은 신의 의지에 대한 도발이다. “저토록 빠른 치타는 왜 제 몸의 얼룩무늬를 벗어나지 못하나요?”라는 의문은 빛나는 시적 언술이지만, 어찌 보면 이 말은 만물에 주어진 물성의 한정과 한계에 대한 원망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신적 권능의 무결점을 아주 믿는 것 같지 않다.

  “누가 부르는 듯해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하는 언술 속 ‘누구’는 믿는 신이 아니다. 부름을 주는 자가 신이 아니라 누군지 모르겠다면, 그것은 신앙의 혼동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사는 가운데 죽음은 언제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질문한다. “잠들 때마다 거미줄이 얼굴을 뒤덮고”에서 ‘거미줄’은 죽음의 공포이고, “아침의 머리카락엔 불들이 흘러내리는 걸까요?” 에서 ‘불’은 생명의 상징이다.

  3연부터는 기도로, 신에게 기원으로 바뀐다. “그냥 웃게 해주세요…지금 먹고 있는 라면을 먹게 해주세요” 그리고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 꽃들 앞에 앉게 해달라는 소박함은 어찌 보면 신의 권능에 대한 도발이다. 왕으로도 만들어 줄 수 있는 권능을 향하여 겨우 라면 마저 먹게 해달라는, 꽃들 피어 있는 동안은 꽃 앞에 앉게 해달라는 소망은 너무나 하찮은 것들이다.

  ‘내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 아르키메데스에게 핀잔이나 들은 알렉산더대왕은 아량이 넓은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의를 무참하게 만드는 모욕을 참고 햇볕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시인이 깜박 잊고 있다. 그의 하느님은 분노하는 질투하는 분이라…

(2015.9.1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