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비』 (문지사, 2015.3.9)
관념이 앞서는 시가 있고 대상이 앞서는 시가 있다. 관념과 대상은 시적 지향의 양 극단이다. 관념 쪽으로 다가갈수록 대상이 망가지고, 대상으로 다가갈수록 관념은 지워진다. 관념이 앞서는 시는 대상을 여럿 조합하거나 수단으로써 부린다. 대상이 앞서는 시는 대상에 빗대어 말하거나 대상만 남겨두기도 한다. 원구식 시인의 이번 시집은 관념이 앞선다. 시인이 시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대상에 빗대어 말해지는 정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엮어 펼쳐놓은 각성이다.
시인은 사물의 이치를 돈오(頓悟)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 사물의 이치란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9)라고, 표제(表題)이자 첫 시 [비]의 결구에서처럼 언급된다. 시인은 물이 자신의 몸을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러 허공을 날고,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10) 역시 날기를 원하는 사물의 욕망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시인은 모든 사물이 날기를 원한다는 나름의 각성으로 시집을 열고, “자본주의가 돈이 없어서 망한 것은 아니다” ([로또] 전문, 115)는 선언으로 시집을 닫는다. 처음의 각성과 마지막의 선언은 얼핏 무관한 듯 보이지만, 그 둘은 매우 유관한 것이다. “오늘 밤도 혁명이 불가능하기에 /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삼겹살을 뒤집는다”(34) 하는 그 ‘삼겹살’ 시는, 사물처럼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절망으로 바뀌어 있는지를 꼬집는 풍자인 셈이다. 자본주의가 돈이 없어서 망할 리 없다. 자본주의는 돈을 필요한 만큼 찍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날고 싶으나 날지 못하는 그 좌절하는 욕망들 때문에 망할지 모른다. 시집을 통틀어 보면, 시인은 경제와 정치 너머를 우려하는 것 같다.
시인이 쓰려고 하는 것은 시 이상인 것도 같다. 각성이든 절망이든 선언이든, 그것들 때문에 시집에서 대상은 뒤로 밀려난다. 문제는 대상이 밀려날수록 관념이 빛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시를 관념으로 아주 밀고 나가면 대상이 죽는 것을 넘어 시가 죽을 수 있다. 그 위험한 곡예를 아랑곳하지 않는 거기에 시인의 묘기(?)가 있는 것 같다.
시집에서, 몇몇 시들은 대상을 아주 뒤로 밀어내지 않는다. 벼랑 끝에 남은 그 몇몇은 아슬아슬하게 빛난다. 그 몇몇이 간신히, 더욱 아름다운 것은 시인의 관념 편향에서 살아 남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중 한 편이 이번에는 ‘아령’이다.
[아령의 역사] - 원구식
쇠는 왜 녹이 스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쇠로 만들어졌다. 오늘 아침 나는 이것을
철거 중인 막다른 골목, 연탄재가
수북이 쌓인 전봇대 뒤에서
발견했다. 그리곤 너무 기뻐 소리쳤다.
와, 녹슨 아령이다!
그런데, 쇠는 왜 녹이 스는가?
아령이여,
쇠로 만들어진 것 중에서
네가 가장 인간적으로 생겼다.
너는 쇠의 알통!
누군가 너를 양손에 쥐고
지구를 들어 올리듯
애인을 들어 올리듯
세상을 들어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쇠는 왜 녹이 스는가?
깨진 벽돌과 기왓장 조각들,
쥐똥들과 고양이 오줌이 지린 막다른 골목에
평행우주가 버려져 있다.
이것은 맨 처음 칼의 손잡이였을 것이다.
칼이 부러져 나가고
달랑 손잡이만 남았을 것이다
손목이 잘려 나가도
누군가 끝까지 놓지 않은 칼의 손잡이.
기적이다. 모든 쇠붙이가 다 실려 나갔는데
너는 아직 살아남아 이곳에 버려져 녹슬고 있다.
이 시의 대상은 아령이다. 아령 한 짝이 철거 지역의 골목 전봇대 뒤 우연하게 남아 녹슬고 있다. 시는 “쇠는 왜 녹이 스는가?”를 세 번 묻지만, 그 답을 내놓지 않는다. 첫 번째 질문 뒤에는 철거 당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아령을 발견하게 되는 우연을 설명할 뿐이다. 두 번째 질문 뒤에는 아령의 한창 때를 상상한다. 아령은 쇠의 알통이며, 누군가 양손에 쥐고 지구를 애인을 세상을 들어올리는 꿈을 꾸던 은유이며 상징이다. 세 번째 질문 뒤에는 아령의 역사를 상상한다. 쇠는 칼의 손잡이였을 수 있다. 칼날이 부러져 나가고 달랑 손잡이만 남았을 수 있고, 손목이 잘려 나가도 끝까지 놓지 않은 주인이 있었을 수 있다. 아령은 모든 쇠붙이가 다 실려 나가도 살아남은, 비록 버려져 녹슬고 있지만, 제 형상을 기억하는 근성의 역사 같은 것이다.
시가 말하는 것은 아령이다. 관념을 흐려 놓고, 아령은 은유로 상징으로 불뚝하다. 그 녹슬어 붉은 아령을 상상하는 동안 시인도 자신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아령은 시에서 분명하게 녹슬고 있는 것이다. 녹슬어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의 시집을 읽는 동안, 시인이 관념을 놓칠 때, 대상이 빛날 때, 시가 더욱 아름답게 읽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시는 관념과 대상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놀이이다.
(2015.12.8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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