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 2014.3.20)
저 밑 어딘가에 써놓은 것처럼,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마치 사람을 사귀는 일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낯설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시집마다 인상이 또한 다르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아름다움을 맛보는 일이고,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시인마다 개성이 남다른 것이 늘 신기한 이유는, 그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한 권의 시집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시인에 따라 말을 풀어내는 성향에 차이가 있다. 직관적으로 인지가 쉬운 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가 있는 것은 그러한 성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성향을 크게 나누어, 한쪽 끝은 ‘외적 언어’라고 다른 끝은 ‘내적 언어’라고 구분해 본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이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기형도,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제1연)
위 기형도의 시 일부는 고드름에 대한 묘사이다. 그 언술은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인지된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라는 말은 고드름이 처마끝에 매달려 있는 것을 형상한다 . 직관적 인지란 논리적 과정을 뛰어넘는 이해이다. 고드름이 영혼이 되고, 처마끝에 매달리는 게 서성이는 게 되는 그 전이(轉移)는 연산(演算)을 통하여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직관적 인지가 잘 될 때 시는 아름답게 읽히며, 직관적 인지를 자주 끌어낼 때 그것을 시가 ‘외적 언어’를 이룬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반면 ‘내적 언어’는 직관적 인지가 쉽지 않다.
황학주(1954-) 시인의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찬찬히 읽지 않으면 몰입이 어렵다. 그것은 시인이 무척이나 ‘내적 언어’로 말하고 있는 때문인 것 같다. 표제(表題)를 이루는 아래 시는 시집의 대표작인 것 같고, 시인의 언어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한 편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황학주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겨울을 춥게 배우다’ 나 ‘겨울이 모이다’라는 시의 서두는 흔히 사용하는 어법과 다르다. 그 언술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상상할 수 있지만, 시인의 의도에 접근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시가 말하려는 것은 한참 되새겨야 얻을 수 있다. 제목이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인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는 고드름에 빗대어 사랑과 죽음을 형상화하려는 게 분명하다.
2연에서 ‘누가 있다’ 할 때, 그 누군가는 죽은 사람으로 읽을 수도,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다. ‘깍지’는 껍질을 말한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그 누군가는 사랑의 껍질을 잃은 외로운 누군가로 읽을 수 있다.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라면, 그것은 기다림이거나 아슬아슬 견디는 것이거나 애처로운 무엇이다. 아무래도 사랑은 사람의 운명이다. 운명의 우연과 덧없음을 견뎌내는 사람의 목숨이다.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는 고드름의 형용이면서,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의 형상(눈부처)을 통해 한없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듯싶다.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하는 그것 역시 고드름의 형용이면서, 그리움을 차고 아리게 그려낸다. 그렇다면, ‘자유를 춥게 배우며’ 하는 마지막 언술은 어마한 고독을 뜻한다. 사랑을 잃고 얻은 자유가 자유일 수 없다. 그 얼마나 춥겠는가.
황학주 시인의 시어들은 난해한 것과 좀 다르다. 시인의 상상은 기형도의 것처럼 독자의 직관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을 ‘내적 언어’라고 이름 붙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시가 대상인 ‘고드름’을 형용하는 때조차 직관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는 오롯이 시인의 몸 속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시에서 ‘내적 언어’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낳기 보다 독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2015.12.22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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